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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건축

고대 이집트의 건축은 풍부한 석재(石材)를 사용한다. 처음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이 주였으나 제2왕조 이후 왕릉(王陵, 피라미드)과 신전(神殿)은 모두 석조로서 주로 석회암이고 요소에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왕궁과 주택은 왕조시대를 통하여 벽돌과 목재를 썼다. 석재는 아스완의 화강암과 투르의 석회암, 시르시라의 사암(砂岩), 하트느바의 알라바스터 등이 특히 유명하고 목재는 레바논의 삼나무를 즐겨 썼다.

 

신전

 

(先) 왕조시대에 있어서 각 지방의 신전은 간단한 오두막을 짓는 식인 듯하였으나 왕조시대 초기부터 본격적인 건축이 되고 후에 석재를 주재로 하고 형식도 복잡하게 되어 '신의 전당'으로서 손색이 없게 되었다. 카르나크의 아멘 신전과 같은 거대한 건축도, 기본적으로 정면 입구의 탑문(塔門)과 중정(中庭), 전실(前室) 및 지성소(至聖所)로 되어 있고, 여기에 성지(聖地)와 나일강 수량계(水量計) 및 후기 왕조에는 특히 탄생전(誕生殿)이 부설되고 경내(境內)를 연와(煉瓦)벽으로 둘러쌌다.

 

탑문 앞에 왕조의 거상(巨像)과 오벨리스크가 각각 한 쌍씩 세워지고 벽면 전체에는 신에 대한 숭배와 왕의 업적을 표시하는 채색부조(彩色浮彫)가 되어 있으며 앞칸은 다주실(多柱室)로 되어 있다. 장제전(葬祭殿)은 특정한 왕의 장례와 제사를 위한 것으로서 신()왕국 시대에 성행하였으나 구조적으로는 일반신전과 큰 차이가 없다. 하트솁수트(18왕조) 여왕의 장제전은 테라스식()인데 특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암굴 신전은 절벽을 이용하여 파서 만든 것으로 누비아의 아부심벨 신전이 대표적이다.

 

 

룩소의 카르낙 신전

 

석주와 기둥머리

 

건축용 기둥에는 목재도 사용하였으나 현존하는 것은 모두 석재이다. 거의 모두가 식물을 모형으로 했는데 야자수형 기둥은 연 줄기 묶음의 기둥에 꽃의 봉오리나 활짝 핀 꽃의 기둥머리를 붙인 것이며 파피루스형 기둥도 그와 같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르면 이러한 복합형도 열 종류가 있다. 주두에 하트홀 여신 얼굴의 주두를 붙인 것도 있다. 화강암·석회암·사암이 주로 사용되었고, 한 개만으로 된 돌 기둥이나 드럼형()의 돌을 쌓아올린 기둥도 있고 비문(碑文)을 파서 채색한 경우도 있다.

 

카르낙 신전의 기둥 모습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obelisk)는 신전(神殿)의 탑문(塔門)앞에 좌우 일기(一基)마다 설치된, 약간 끝이 가는 4각형의 거대한 석주로, 끝은 4각추(四角錐)이며 기둥의 표면에는 히에로글리프비()가 있다. 헬리오폴리스 태양신 숭배에서 기원한다고 말해진다. 통상적으로 아스완의 화강암을 끓어 낸 것으로서 하트솁수트 여왕의 것은 높이가 30m, 300t 이상에 달한다. 지금까지 50() 이상이 침입자의 기념품으로 해외에 가지고 나가게 되어 원위치에 서 있는 것은 5기에 불과하다.

 

 

프랑스 파리의 꽁고르드 광장에 세워져있는 오벨리스크

분묘

 

영혼 불멸을 믿었던 이집트 사람은 묘, 즉 영원한 집의 건축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왕조시대에는 원() 또는 타원형의 수혈(竪穴)이었으나 제1왕조경부터 마스타바분(mastaba)이 출현하였다. 이것은 직 4각형 평면의 피라미드를 단두(斷頭)한 모양인데 기와나 석회암으로 만들어지고, 현실(玄室)은 지하에 두고 사당(祠堂)은 지상에 설치하였다. 초기 왕조의 묘도 이 형식이다. 사당의 방 벽면은 각종의 광경이 부조로 덮여 있으며, 맨 안쪽에 영혼이 출입하는 위문(僞門)을 만들어 두었다.

 

3왕조부터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왕묘(王墓)가 되어 제17왕조까지 답습되었다. 18왕조로부터 왕묘는 인적이 드문 산중의 암굴분(岩窟墳)이 되고, 신전은 분리하여 장제전(葬祭殿)이 되었다. 귀족의 묘도 단애(斷崖)나 경사진 사면을 이용한 암굴분이 되어 입구 위쪽으로 피라미드를 구축한 예도 있다. 벽면은 회화 또는 부조로 덮여 있어 회화사(繪畵史) 연구의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왕묘의 경우에는 긴 종교문서 비문(碑文)을 새겨 두었다. 정중한 장례가 당시의 풍속이었기 때문에 부장품은 다량에 이르러 이집트 미술의 공급원이 되고 있다.

 

피라미드

 

피라미드는 북쪽으로 카이로 북부에서 남쪽으로 수단까지, 나일강을 따라 약 1,500km가 넘는 지역에 흩어져 있다. 대략 3000년에 걸쳐 300개 이상 지어졌다.[2] 현재까지 발굴된 피라미드는 138개이고, 이들은 대부분 카이로 서쪽 아부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나일강 서안 사막에 흩어져 있다.

 

피라미드는 갑자기 나타난 건축 양식이 아니라 이전의 마스타바라는 벽돌식 단층 무덤에서 발전하였다. 마스타바는 무덤으로 이곳에 왕을 매장했다. 마스타바는 아랍어로 직사각형 벤치라는 의미이다. 파라오 조세르(Djoser) 시대에 마스타바를 더 높고 웅장한 형태로 변형하여 다층 마스타바 혹은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이 계단식 피라미드는 임호테프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후 파라오 스네프루(Sneferu, Snefru)는 현재 우리가 아는 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을 건설하려고 시도했으나 당대의 피라미드 건축 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붕괴하고 만다. 스네프루는 이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피라미드를 지었는데 피라미드 각이 너무 예각이었던 탓에 다시 붕괴 위험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공사 중 각도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굴절 피라미드라고 한다.

 

그러나 스네프루는 굴절 피라미드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더욱 상징적이고 미적으로 완성된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 사업은 성공적으로 끝나 현재 우리가 보는 이집트 피라미드 이미지와 같은 건축물이 완성되었다. 다음의 파라오 쿠푸(Khufu)는 이미 완성된 선대 파라오의 피라미드에서 그 규모를 극대화하여 대규모 피라미드를 완성했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쿠푸 왕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해 노역하라고 명령했다.

 

10만 명은 아라비에 산맥의 채석장들에서 네일로스강까지 돌을 견인해 가게 하고, 10만 명은 돌들이 배에 실려 네일로스강 건너로 전해지면 다시 리비에 산맥까지 끌고 가게 명령했다. 그들은 각각 3개월 동안 노역했고, 돌을 운반하는 길을 닦느라 10년 동안 고생했다. 피라미드 자체를 만드는 데 20년이 걸렸다1989년 발굴 조사로 피라미드 근처에서 피라미드 마을이 발견된 후 사람들 인식이 바뀌었다.

 

 

피라미드 내부 모습
피라미드 건축 설계도
피라미드 건설현장 모습

 

마을에는 노동자가 살았던 숙소, 공방, 저장고, 물품 관리소, 관리들이 살았던 저택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곳 묘지의 벽화를 보면 사람들이 빵, 맥주, 고기, 채소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물과 상형문자는 마을 사람들이 노예처럼 착취당한 것이 아니라 만족하며 일했음을 보여 준다.[4] 실제 동원된 사람들 숫자도 2만 명 내외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거대한 피라미드는 이전까지 고대 이집트인들의 끊임없는 노력, 건축 기술의 개량과 발전이 바탕이 된 것이며 단시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이후 거대한 피라미드가 정점을 이루고, 평민들까지 피라미드를 세울 수 있게 되면서 사람 크기 정도의 작은 피라미드들도 만들어졌다.

 

 

스핑크스

 

스핑크스(sphinx)는 사자의 몸에 사람의 머리가 달린 상상속의 동물이다. 이 괴물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동남아시아 등 지역의 설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핑크스라고 하면 기자의 대스핑크스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를 붙인 동물로 왕권의 상징, 선한 자의 보호신 역할을 하였다. 가장 오래되고 최대의 것은 이집트 제3왕조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에 부설되어 있고, 길이 80m에 달하여 이것이 신왕국시대에는 하르마키스 신(지평선상의 호루스)으로서 숭배되었다. 카르나크 신전 등의 참도(參道) 양측의 스핑크스는 아몬 신의 신수(神獸)인 양의 머리를 붙여 두 개의 지평선(영토)’의 수호신으로 하였다. 그리스 신화의 스핑크스와는 다르다.

 

스핑크스의 본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