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시대를 대표하는 거대한 건축으로는 콜로세움·판테온·수도(水道)·목욕장 등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폴로 로마노 가까이에 있는 콜로세움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기원 72년에 기공하고, 그 아들 티투스제(帝)가 80년에 완성한 타원형의 대투기장(大鬪技場)으로서 그 장경(長徑) 188m, 단경(短徑) 156m, 높이 48.5m, 외관 4층의 대건축이다.
외관상의 미를 추구한 그리스 건축과 달라서, 로마 건축은 내부 공간의 충실을 기하고 있다. 실용성을 중시한 로마인은 내부의 거주성(居住性)에 중점을 두고, 내부를 넓게 하기 위하여 벽돌로써 아치형을 사용했다. 아치형에서는 상부의 중력은 원 둘레의 각 부분에 균등하게 중합(重合)하기 때문에, 기둥의 수를 줄이고 내부를 넓힐 수 있다.
로마 건축사상 불후의 명작이라고 하는 판테온은 고대 로마 최대의 원개 건축(圓蓋建築)이다. 현존하는 신전은 기원 120년경까지 하드리아누스제(帝)에 의하여 세워진 것으로, 당(堂)의 지름은 43.2m, 천장의 높이도 이것과 같고 벽의 두께는 6.20m, 가운데에는 지름 9m의 원형 천창(天窓)이 있다. 내부의 주위에는 코린트식의 기둥을 가진 일곱개의 감실(龕室)이 있고, 둥근 대청 북쪽 입구에 코린트식의 기둥 8개를 나란히 세운 현관랑(玄關廊)이 있다. 그 외관은 극히 간소하여, 충실한 내부의 아름다운 공간과는 대조적이다.
로마 건축에 있어서의 모뉴먼털리티는 실용성과, 주제의 다양성이다. 여기서는 신전을 비롯하여 바실리카·극장·욕장(浴場)·별장·개선문(凱旋門)·수도·기념탑 등이 역대의 황제에 의하여 건조되었다. 각기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遺跡)으로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바실리카, 카라칼라 황제의 욕장,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별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탑, 가르드의 다리 등이 알려져 있다.
콜로세움
콜로세움
콜로세움(Colosseum,이탈리아어 : Colosseo 콜로세오)은고대 로마 시대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로마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으로서 5만 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로마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있고, 현재는 로마를 대표하는 유명한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거대 동상인 콜로서스(巨像:colossus)에서 유래한다.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으로, 서기 72년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해 8년 뒤에 아들인티투스 황제 때 완공되었다.
콜로세움은 수 세기 동안 계속 개축되어왔고,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는 5만 명에서 8만 명의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콜로세움에서는 주로 검투사들의 결투가 이루어졌으며, 모의 해전, 동물 사냥, 신화의 재연 등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졌다. 다만 중세에 이르러 제국이 쇠퇴하고 로마가 폐허로 변하자, 콜로세움도 이와 같은 변화를 피하지 못하고 요새, 교회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콜로세움은 지진과 약탈, 채석 같은 파괴 행위로 상당 부분이 손상을 입었으나, 여전히 로마의 상징과 같이 여겨지고 있다. 로마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 중 하나이며 2018년에는 480만 명의 관광객들을 끌어들였다.
콜로세움은 이탈리아에서 사용되는 1센트 유로화 동전에도 새겨져 있다.
콜로세움의 구조
외부
언덕과 같은 자연 지형에 기대어 지어진 고대 그리스의 원형극장들과는 달리, 콜로세움은 완전히 독립적인 건축물이다. 그 길이는 189m이고 너비는 156m이다. 또한 그 면적은 24,000제곱미터이다. 외벽의 높이는 48m이고, 둘레는 본디 545m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장 내부의 중앙 무대는 길이 87m, 너비 55m의 타원형 구조이며 높이가 5m에 달하는 벽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외벽은 10만 입방 미터에 달하는 석회암으로 이루어졌고 300톤에 이르는 청동 구조물로 지탱되었다. 하지만 수세기 동안 지진들이 일어나며 곳곳에 균열이 갔고 남쪽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현재에는 북쪽 벽만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고, 외벽 끝부분에 발라져 있는 삼각형 모양의 콘크리트 지지물은 19세기 초, 비교적 현대에 추가된 것이다. 다만 그 외의 나머지 부분들은 모두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벽들이다. 외벽은 층층이 쌓여있는 3개의 기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둥의 열들은 층마다 그 양식이 다른데,도리스 양식 ,이오니아 양식,코린트 양식 등 다양한 양식의 기둥들을 모두 사용하여 지었다. 2층과 3층의 아치에는 원래 신화 등장인물의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어 그 화려함을 더했다.
200개의 가죽 차양이 콜로세움 내부에 설치되어 관중으로부터 태양빛과 비를 차단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차양은 경기장의 3분의 2를 덮을 수 있었고, 공기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안쪽으로 기울어진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인근 로마 해군 본부에서 특별히 선별된 인원들이 이 차양을 설치하고 내리는 데 투입되었다. 콜로세움은 거대한 규모였지만, 유사시 관중들을 빠르게 대피시킬 수 있는 기능 또한 갖고 있었다. 로마의 건축가들은 관중들의 빠른 유입과 퇴장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들을 고안해 냈다. 콜로세움에는 약 80개의 출입구가 있고, 이 중 76개는 일반 군중들이 사용했다. 각 출입구는 고유한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북쪽의 정문은 황제와 귀족들을 위한 것이었고 나머지 동, 남, 서쪽에 있는 문은 로마의 엘리트층이 주로 사용하였다. 4개의 주요 문은 타일과 황금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 파편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외벽 자체가 많이 무너지며 현재는 32개의 문만이 남아 있다. 관중들에게는 입장할 때 번호가 새겨진 도자기 파편 형태의 입장권이 주어졌으며 그가 예약한 관중석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능을 했다. 그들은 넓게 뚫린 통로를 통해 좌석으로 움직여갔으며, 이와 같은 방식은 사람들을 빠르게 흩어질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콜로세움의 실용적 구조는 몇 분만에 모든 관중들을 밖으로 대피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내부
콜로세움은 최대 8만 7천명에 달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좌석들은 로마 사회의 계급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었는데,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경기장과 가까운 하부의 좌석을 쓸 수 있었고, 계급이 낮을 수록 경기가 자세히 보이지 않는 위쪽의 좌석을 분배받았다. 특히 황제와 베스타 사제들에게 가장 전망이 좋은 북쪽과 남쪽의 자리가 헌정되었고 그 바로 옆에 원로원 의원들을 위한 널찍한 연단들이 줄지어 있었다. 현재 콜로세움에는 5세기 경 원로원 의원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의원들의 자리가 어디인지 미리 알려주기 위해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지어졌다. 도리아는 남성, 이오니아는 여성으로 주로 표현된다.
그 위의 좌석들은 원로 의원들이 아닌 귀족이나 기사들에게 주어졌다. 그 위는 또다시 로마의 평민들 중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이 둘로 나뉘는 등 신분제도가 엄격하게 지켜졌다. 다만 교사를 동반한 소년, 군인, 외국 고위 인사, 서기관, 사제와 같은 특권 계층에게는 따로 그들만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 동안 콜로세움의 최상층에 목재로 지은 좌석열이 마련되었다. 이는 도시의 최빈층과 노예들을 위한 것으로, 아마도 서있거나 거친 의자에 겨우 앉아있었어야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콜로세움 내부에 무덤 관리인, 배우, 전직 검투사들은 아예 그 출입이 금지되었다.
중앙 경기장
경기장 자체의 크기는 길이 83m, 너비 48m이다. 본래 모래로 뒤덮인 나무 바닥으로 정교한 지하의 구조들을 가리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지하의 구조물들은 콜로세움이 지어질 때는 없었으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지시로 지어진 것이다. 이 구조물들에는 노예와 검투사들이 경기 직전까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맹수와 동물들이 이 곳에서 갇혀 대기하고 있었다. 이 구조물들은 여러 차례 개축되었고 적어도 12번에 달하는 변화를 겪었다. 이 구조물들은 곧바로 콜로세움 외부로 이어지기도 한다. 동물들과 조련사들은 경기장 근처의 마구간에서 이 구조물을 통해 곧장 콜로세움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고, 황제와 베스타 신녀들도 군중의 눈길을 피해 이 터널들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경기장에는 많은 양의 기계 구조물들이 있었다. 엘리베이터와 도르래는 동물들을 곧바로 경기장 내부에 풀어놓을 수 있게 했고, 심지어는 나무와 조형물들까지도 들었다 내렸다하며 풍경들도 바꿀 수 있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어떤 기계는 근처 수로와도 연결되어 있어 곧바로 경기장 내부에 물을 가득 채워넣을 수 있게 했다고도 한다. 다만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모의 해전과 물을 사용한 경기를 제한하며 없어졌다고 한다.
용도
콜로세움은 검투사 경기 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사의 주최지로 사용되었다. 이 공연들은 항상 국가가 아닌 개인들이 주최하는 행사들이었으며, 주최자의 권력과 부를 과시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인기를 얻고 가문의 명예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가장 인기있었던 공연은 동물 사냥이었다. 주로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수입한 야생동물들을 활용하였는데, 코뿔소, 타조, 호랑이, 사자 등이 주요 구경거리였다. 사냥은 움직일 수 있는 나무들과 건물들이 있는 정교한 세트장에서 진행되었고, 대중들은 이와 같은 방식에 열광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키아를 정복한 기념으로 대대적인 행사를 열었는데, 11,000마리의 동물들과 10,000명의 검투사들이 이때 희생되었다고 한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중에서 운동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검투사가 되면 이득도 있었다. 다른 노예들보다 생활환경이 훨씬 나은 군대식 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음으로써 한편으로는 일체감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은 알몸으로 맹수 앞에 서게 되고, 산채로 찢기는 형벌을 받았다. 또한 결투가 진행되는 도중도중, 마술사나 곡예사들이 나와 군중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콜로세움 초기에, 이 곳에서는 모의 해상 전투가 열렸다고 한다. 서기 80년 티투스 황제가 개최한 행사에는 특별히 조련된 동물들을 보여주기 위해 경기장을 물로 채웠다는 기록들이 있고, 고대 그리스 시대의 유명한 해상 전투를 재현한 행사도 열렸었다고 한다. 다만 이 경기장에서 어떻게 물이 새지 않도록 막을 수 있었는지, 군함이 들어올 정도로 충분한 크기가 있었는지, 어떻게 물을 끌어올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다.경기장에서는 종종 실제 관목과 숲들도 옮겨져 전시되었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세트장은 신화의 이야기나 영웅적인 이야기들을 소개할 때 주로 사용되었는데, 때때로 죄인이 짐승들에게 산채로 으깨지거나 불에 타는 것과 같은 잔인한 행사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판테온 (로마)

판테온(라틴어: Pantheon)은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옛로마 신전으로, 7세기 들어 가톨릭 성당으로 활용되면서 지금까지 전한다. 판테온은 그리스어 ‘판테이온(Πάνθειον)’에서 유래한 말로,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라는 뜻이다. 고대 로마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사용하려고 지은 로마의 건축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인 서기 125년경 재건했었다.
모든 고대 로마 건축물 가운데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고, 전 세계를 통틀어 당대 건물 가운데서도 가장 보존 상태가 좋다고 평가된다. 역사적으로 판테온은 쭉 사용했었다. 현존하는 건물의 설계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건축가인 다마스쿠스의아폴로도루스가 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 건물 자체와 건물의 설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나 그의 건축가들이 했을 가능성이 크다. 7세기 이후부터는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당으로 사용했다. 판테온은 현재 로마에서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돔 구조이다. 바닥에서 원형 구멍까지의 높이와 돔 내부 원의 지름은 43.3m로 같다.

바실리카식 성당의 특징
성당은 어떤 건물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드리기 위한 공간을 가진 건물, 그것이 성당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공간은 벽과 기둥, 보와 지붕, 행위를 담는 바닥이라는 건축의 형식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그런데 크게 보면 성당의 형식은 두 개뿐이다. 이 두 형식은 아주 오래전 고대 로마 건축 유형에서 받았다. 하나는 ‘영묘(靈廟, 마우솔레움 mausoleum)’를 이어받은 원형의 건물이고, 다른 하나는 직사각형의 홀 건물 유형인 ‘바실리카(basilica)’라는 공공건물이다. ‘영묘’는 순교자 기념 성당에서 직접 전개되었고, 중심형 평면의 정교회 성당으로 발전했다. 이와는 달리 가톨릭교회는 사람이 모인다는 점에서 기능이 같았던 바실리카를 더 중요한 모델로 선택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통치하던 시기의 후반에는 짧은 기간에 수많은 기념비적인 그리스도교 바실리카가 지어졌고, 니케아 공의회 이후 바실리카식 성당은 지중해와 유럽 전역에서 기본 형식이 되어 오늘날에 이어지고 있다.
바실리카식 성당은 어떤 특징을 가졌는가? 입구에 들어오면 나르텍스, 곧 문랑(門廊)이나 입구 안에 있는 홀을 지나 회중석에 들어선다. 긴 축의 끝은 앱스(apse)를 향한다. 앱스란 직사각형 건물의 짧은 변에 돌출된 반원형 제단을 말한다. 가운데는 중랑(中廊)이 있고, 그 옆에는 길게 늘어선 기둥을 따라 측랑(側廊)이 붙어 있다. 중랑의 천장은 높고 측랑의 천장은 그보다 낮다. 그리고 그 지붕 높이의 차이만큼 높은 곳에 창이 있는 고창층이 있다. 이것이 ‘바실리카식’ 성당의 독특한 평면과 공간 형식이다. 이런 바실리카식 성당의 특징은 모두 익히 잘 알고 있다. 서울 명동대성당이나 대구 계산대성당 등이 모두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바실리카식 성당은 그리스도교가 처음부터 고안한 건축은 아니었다. 바실리카란 본래 고대 로마제국에서 재판 등에 사용되던 다목적 공공의 홀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성당의 형식으로 변형되면서, 그것이 지니고 있던 독특한 평면과 공간 형식을 ‘바실리카식’이라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바실리카’는 이런 평면과 공간의 특성을 가진 ‘바실리카식’과는 다른 말이다. 따라서 평면이 직사각형이기만 한 성당이 바실리카식 성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바실리카의 기능은 커다랗고 넓은 회의장이었다. 그러나 300년 무렵 바실리카는 다른 공공건물의 영향을 받아 엄청나게 활기가 넘쳤고 쉽게 변경할 수 있었는데, 이는 기존의 사원 건축과는 비교가 안 됐다. 용도도 다양했다. ‘포룸 바실리카’라 하여 이웃하는 시장이 연장된 것, 화폐를 교환하기도 하고 의류를 팔고 사는 곳이기도 했다. 상업상 거래도 하고 갤러리처럼 식기를 전시하며 군인 훈련장으로도 쓰였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이 많이 모인 바실리카는 자연스레 소문도 퍼지고 소식을 전해주는 홀이 되었다. 이렇게 로마제국의 도시에는 대부분 광장의 일부로서 중심적 공공건물인 바실리카가 있었다.
바실리카에서 태어난 예배 공간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의 제도를 이용해 조직을 정비하고 확충하며 여러 도시에 주교좌를 두고 포교의 핵으로 삼았다. 그들이 바란 것은 많은 사람이 함께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성당을 짓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나 되었다. 이 많은 신자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전례 공간. 그 답은 바로 로마제국의 어느 도시에나 있던 공공건물인 바실리카를 변형하여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바실리카를 선택한 것은 넓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바실리카는 제국 전체에서 법정 등의 공적인 홀로 사용되었고 더욱이 황궁의 알현실로도 쓰였으므로 황제의 권력과 관계가 깊은 공권력의 상징 건물이 되었다. 4세기 초에는 바실리카의 목조 지붕 밑에 있는 직사각형 넓은 홀의 작은 변에 앱스를 두고 중심적 요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는 ‘데이스(dais)’라는 높은 단을 두었고, 그곳에 치안 판사 등 고위 관리가 앉아 공무를 수행했다. 그 판사석 가까운 곳에는 황제를 그린 그림이나 조각을 두어 그들의 법적 권한이 황제에서 왔음을 상징했다. 그래서 로마제국에서 자란 사람은 앱스라는 건축 형태가 제국의 법적 권한을 암시하고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바실리카식 성당은 직사각형의 바실리카 평면을 90도 회전하여 작은 변에서 들어오게 했다. 간단한 변형으로 모두에게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전혀 새로운 건축이 생겨났다. 종점인 앱스를 향하는 긴 축이 생겼고, 앱스 안에 거룩하신 하느님께 미사를 드리는 제단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바실리카의 외부는 평평하게 뻗은 벽으로 되어 있었으나 내부는 위엄이 있었다. 대리석 벽에 금박을 입힌 기둥머리와 높은 우물 반자 천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방들이 격식 있게 배열되었다.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을 보라. 격리된 내부 공간에서 성체성사 등의 전례를 거행하는 신비의 종교 그리스도교의 전례 공간은 이렇게 바실리카에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