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미술은 1400년 경 이탈리아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 문학, 음악, 과학, 기술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여 두드러진 양식으로서 중세 시대의 신을 중심으로 했던 문명에서 탈피하여 고대 그리스의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를 다시 살려 내는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탈리아
회화
알베르티, 브루넬레스키가 건축에서, 그리고 기베르티, 도나텔로가 조각에서 이룬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이 회화에 있어서는 마사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사리의 열전(列傳)에 기술된 것처럼, 그가 프레스코화를 그린 피렌체에 있는 카르멜회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회는 많은 르네상스 화가들의 수업의 도장이 되었다. 한편 북이탈리아의 파도바와 베르니는 계속하여 베네치아에게 정복당하여 신문화와 연결이 되지만 처음에는 오히려 위의 두 도시가 능동적이었다. 총독 저택을 장식한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뒤를 이어서 피사넬로는 국제 고딕 양식을 베네치아에 가지고 가서, 우아한 성모자(聖母子), 공상적인 의상, 우화동물 등 장식 문양적인 표현이 북이탈리아에 퍼졌다.
이탈리아인들은 먼 옛날에는 로마를 수도로 하는 자신들의 나라가 문명세계의 중심이었는데, 고트 족과 반달 족 같은 게르만 족이 침입해와서 로마제국을 붕괴시킨 이래로 그 권세와 영광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인들의 마음속에 품은 부흥이라는 관념은 '위대했던' 로마'의 재생이라는 생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돌아다보는 고전시대와 그들이 희망하는 재생(부활 : 르네상스)의 새로운 시대 사이에 놓인 기간은 단지 하나의 슬픈 막간, 즉 '중간 시대'에 불과했다. 이렇게 해서 재생, 즉 르네상스라는 관념은 그 중간의 시대가 '중세'라는 관념을 낳게 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트 족 때문에 로마제국이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므로 마치 우리가 아름다운 물건들을 쓸데없이 파괴하는 짓을 가리킬 때 반달리즘(Vandalism)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 중간 시기의 미술을 고딕(Gothic)미술이라고 부르고 '야만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세의 이탈리아는 다른 지역보다 낙후되었기 때문에 피렌체의 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 1267~1337)는 비잔틴 보수주의 주문(呪文)을 깨고 신세계로 감히 뛰어들 수 있었으며 고딕 조각의 실물과 같은 조각상들을 회화에 대입 시킬 수 가 있었다. 이처럼 천재적인 이탈리아 미술은 피렌체의 화가였던 지오토에게서 확인되었다. 보통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는 말할 수 있어도, 르네상스 시대를 연 예술가는 누군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사회인 중세에서 인본주의 르네상스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를 개척한 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의 그림과 이야기를 소개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다 훨씬 먼저 르네상스 예술을 시도한 화가가 있다. 1267년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인 끌레 디 베스피자노에서 태어난 지오토(Giotto)는 어릴 때부터 당대 유명했던 화가 치마부에에게서 미술을 배웠다. 새로움을 추구한 그는 전통적인 비잔틴 양식의 종교화가 일색이었던 당시 미술 화풍에 신선함을 주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교회를 짓는 일이 더 이상 건축가들의 주된 과업은 아니었다. 나날이 발전하고 번창하는 도시에서는 시청 청사라든가 조합 사무실, 대학, 궁전, 다리와 성문 등 많은 세속적인 건물들이 필요했다.
이런 건물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특징있는 것 중의 하나가 베네치아에 있는 도제궁인데 이 건물은 베네치아의 권세와 번영이 최고에 달했던 14세기에 착공되었다. 이 건물은 고딕 양식의 발전이 후기에 이르러 장식과 트레이서리에 많은 비중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장엄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에서는 소위 초기영국 양식(Early English Style)이라고 알려진 순수한 고딕 양식과 이런 형식들이 발전하여 그 후에 생긴 소위 '장식적 양식(Decorated Style)'이 있다. 14세기의 고딕 양식 건축가들은 초기 성당의 장엄한 외관에만 만족하지 않고 장식과 복잡한 트레이서리를 통해 그들의 솜씨를 과시하고자 했다. 엑스터 성당의 서쪽 창문이 장식적 양식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14세기의 가장 특징적인 조각 작품들은 그 시대의 교회를 위해서 만들어졌던 수 많은 석조건물들이 아니라 당시 장인들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귀금속이나 상아로 만든 소품(小品)들 이었다. 위의 작품은 프랑스의 금세공사가 은에 금도금을 하여 만든 작은 성모상이다.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은 개인적으로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 대저택의 예배실에 안치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작품은 사랑과 자비로움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작품의 제작자는 성모를 진짜 어머니로, 그리고 예수를 어머니의 얼굴을 만지는 실제의 어린아이로 생각했다. 그의 공적은 정교하게 처리된 모든 세부 묘사나 손의 아름다움, 아기 팔에 나있는 작은 주름살, 그리고 길고 가느다란 몸에 얹혀진 머리에서 볼 수 있는 이 조각상의 정확한 비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른 손 위로 흘러내리는 옷 주름과 같은 세부 묘사들은 우아하고 선율적인 선으로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서 이 조각가가 들인 무한한 정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14세기 화가들의 우아하고 섬세한 세부 묘사에 대한 집착은 <메리 여왕의 기도서>라고 알려진 영국의 기도서와 같은 유명한 필사본들에서 엿볼 수 있다. 위 그림은 박식한 유대의 율법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성전의 예수'를 보여준다. 화가는 예수를 높은 의자위에 올라앉혀 놓았는데, 이는 중세 미술가들이 설교사를 그릴 때 즐겨 사용했던 특징적인 손짓으로 교리의 요점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이다. 율법학자들은 두려움과 놀라는 자세로 손을 들고 있으며, 방금 그곳에 도착한 그리스도의 양친도 서로 상대방을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며 손을 들고 있다. 이 화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하기 위해서 그것을 연출하는 방법을 발견한 르네상스 시대를 연 피렌체의 화가 지오또(Giotto)에 대해서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성경에 의하면, 당시 예수는 열 두살 이었는데 어른들과 비교해서 너무 작게 그려져 있고 또 인물들 사이의 공간을 사실적으로 처리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성경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상생활에서 따온 매를 이용해서 오리를 잡는 장면이다. 매 한마리가 오리 한 마리를 덮치고 있고 다른 두 마리는 날아서 도망치고 있다. 이를 보고 말을 타고 있는 남녀와 그 앞에 있는 소년이 기뻐하고 있다.
북유럽 미술가들의 취향과 양식이 대단히 깊은 영향을 준 곳은 또 하나의 토스카나 마을로 피렌체의 적수였던 시에나(Siena)에서 였다. 지오토와 같은 세대로 시에나의 거장인 두치오(Duccio : 1255~1315년)는 고대 바잔틴 형삭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서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너으려고 노력한 결과 성공을 거두었다. 위의 그림은 그의 유파중에서 그보다 젊은 두 대가인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 : 1285~1344sus)와 리포 멤미(Lippo Memmi : ~1347)가 그린 제단화이다. 이 그림은 14세기의 이상과 일반적인 분위기가 어느 정도까지 시에나의 미술에 흡수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수태고지를 묘사한 이 그림은 대천사 가브리엘이 하늘에서 내려와 성모 마리아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인데 가브리엘이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Ave gratia plena)" 라는 말을 하고 있음 알 수 있게 그의 입 주위에 그 말을 직접 써 놓았다. 그의 왼손에는 평화의 상징인 얼리브 가지가 들려 있고 오른 손은 마치 말을 시작하려는 듯한 자세로 들고 있다. 성모는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는데 천사의 출현으로 매우 놀라고 있다. 둘 사이에는 처녀성의 상징인 흰 백합이 꽂힌 꽃병이 놓여있고 중앙의 뾰족한 아치 밑에는 성신의 상징인 비둘기가 네 날개를 가진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두 화가는 흘러내리는 의상의 부드러운 곡선과 가느다란 몸매의 미묘한 우아함을 즐겨 그렸다. 우리는 이 인물들을 패널의 복잡한 형태 속에 알맞게 배치한 방식에, 즉 천사의 날개가 왼쪽 아치에 들어맞게 그려졌다든가 뒤로 움츠린 마리아가 오른 쪽 아치 속에 그려지고 이 두 인물 사이의 공간을 꽃병과 그 위의 비둘기로 채운 방법 등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이 시기의 미술가들과 사상가들은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옮겨다녔으며, '다른 지방의 것'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1300년대 후반에 이처럼 서로 주고 받는 가운데 생겨난 양식을 역사가들은 '국제적 양식'이라고 불렀다. 영국에 있는 이런 작품들의 한 경이적인 예로 프랑스의 대가가 영국왕을 위해 그린 소위 <윌튼 두폭화>(Wilton Diptych)를 들 수 있다. 이 그림은 여러가지 이유로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실제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보헤미아의 앤 공주의 불행한 남편 리차드 2세라는 점이다. 리차드 2세는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세례 요한과 두 명의 왕실 수호 성인들이 그를 성모에게 천거하는 것 같이 보인다. 성모는 천국의 꽃으로 덮인 초원에 서서 왕의 표시인 황금뿔을 가진 하얀 숫사슴을 가슴에 단 아름다운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아기 예수는 왕에게 축복을 내리거나 환영하듯이 그리고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을 확약하듯이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있다. <윌튼 두폭화>가 위에서 소개된 작품들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아름답게 흐르는 선과 우아하고 섬세한 주제를 어떻게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화가가 패널의 오른 쪽에 보이는 무릎을 꿇고 있는 천사의 자세에서 어떻게 단축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또 상상의 천국을 장식하는 수 많은 꽃에서 그가 자연으로부터 얻은 연구의 결과를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부르고뉴의 한 부유한 대공이 랭부르(Limbourg) 형제의 공방에 주문해서 만든 기도서에 붙은 달력은 위에서 소개된 <메리 여왕의 기도서> 이래로 실생활의 사생에서 얻은 이러한 그림들이 생명감과 관찰력을 어느 정도까지 발전시켰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세밀화는 귀족들의 새해 행사인 선물을 주고 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화가들은 상이한 유형의 인간들을 구별하여 그리기 위해서 어찌나 세심하게 애를 썼던지 마치 그들의 이야기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화가가 그린 사람들의 얼굴도 하나의 매력적인 인물상의 공식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전에는 성경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을 묘사하는 고대의 공식을 배우고 이러한 지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훈련은 충분했다. 이제 미술가의 작업은 자연으로부터 스케치를 할 수 있어야 했고, 또 이것을 그의 그림에 옮겨 담을 수 있어야했다. 그는 스케치북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희귀하고 아름다운 동식물들의 스케치를 비축해두어야 했다.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년 1월 8일, 르네상스 미술의 개척자
지오토 본도네는 신화적이고 과장적이며 평면적인 구성이 아닌 자연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측면과 후면을 묘사하는 등 이전 회화에서 볼 수 없었던 기법을 시도했다. 단축법, 투시법, 명암대비를 이용해 공간감과 입체감을 만들었다. 특히 배경에 구체적인 풍경이나 건물을 그려넣은 최초의 화가다. 얼마나 그의 화법이 신선하고 위대했는지는 당대 유명 작가들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우선 동시대 인물로 이탈리아 시인 ‘단테(Dante)’는 “치마부에의 시대는 갔다. 지금부터는 지오토의 시대다”라며 극찬했고 후대 화가인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의 경우 “수세기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회화예술에 빛을 던진 사람”이라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지오토의 미술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저술가들이 칭송했던 고대의 유명한 거장들의 걸작만큼 훌륭하다는 의미에서 지오토는 고대 미술의 진정한 부활을 유도해낸 거장으로 칭송되었다.
1300년대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예술과 과학과 학문이 고전 시대에 번창했으나, 이 모드 것들이 거의 다 북쪽의 야만인들에 의해서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이 영광스러운 과거를 다시 부흥시켜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과 희망이 다른 도시보다 강하게 나타난 곳은 단테와 지오토의 출생지이자 부유한 상업도시인 피렌체였다. 바로 이곳에서 1400년대 초에 일단의 미술가들이 계획적으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 과거의 미술 개념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영광은 이들보다 200년 앞서 지오토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지토와 그의 친구 단테의 유산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본격적으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곧 다른 유럽지역으로 전해졌고, 그것은 암흑시대라고 불리는 중세의 종말을 가져왔다.
피렌체파는 14세기로부터 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여 르네상스 미술의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회화에서는 주지적 합리주의(主知的合理主義)·조형적 형태주의(造形的形態主義)가 그 특징이다. 주제에 관련이 있는 것만을 단순화하고, 또 이를 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공간구성은 화면 안의 통일이다’라는 고딕과는 다른 형식의 회화를 만들어냈다. 이 전통은 장식적인 시에나파와 대립하여 14세기 이탈리아 회화의 2대 조류를 이루었다. 한때 시에나파의 영향을 받아 장식적인 것이 되었으나, 마사초, 브루넬레스키등의 투시도적 수법과 도나텔로의 조형적 성과를 도입한 다음부터는 회화적 현실의 표현에 신천지를 개척하였다.
조각
1400년대 초엽, 그 때까지 그 본질에 있어서 중세적 양식을 답습하고 있던 이탈리아 조각은 종래에 볼 수 없었던 두 개념, 즉 고전 형식의 재현과 적극적인 사실(寫實) 표현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고전 예술에 대한 관심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이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서 중시하는 고대 사상과 그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 반면에 휴머니즘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을 불러일으켜, 북방에 있어서 중세 예술의 말기를 장식하는 자연주의로 나아갔다. 같은 자연주의라 할지라도 15세기에 있어서 자연에의 접근은 중세와 달라서 직관적이기보다는 과학적이었고, 종합적이기보다 분석적이며, 신의 질서를 상징하는 것보다 자연 바로 그것을 위하고, 세계의 기존 사실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나체상이 또다시 주제로 채용된 것은 그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