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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술 - 1,400년대 중기 르네상스 (1)

피렌체를 중심으로 젊은 예술가들이 계획적으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 과거의 미술 개념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들 젊은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는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lippo Brunelleschi : 1377~1466) 였다. 당시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대성당을 완성시키는 일을 맡고 있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들의 성당을 거대한 돔(dome)으로 덮기를 원했으나 브루넬레스키가 이런 돔을 완성시키는 방법을 고안해낼 때 까지 이 돔을 받쳐주는 기둥들 사이의 거대한 공간을 덮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lippo Brunelleschi, 1377~1466) 가 완성한 <피렌체 대 성당의 돔> 돔 공사는1420-36년에 완공되었다.

 

피렌체 대 성당의 돔의 단면도

 

피렌체 대성당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1296년에 (설계안은 여러 번 바뀌고 나중에는 규모가 작아지기는 했지만) 설계했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는산타 크로체 성당과 베케오 궁전의 건축가였다. 그는 세 개의 넓은 중랑(中廊)이 팔각형 돔 아래에서 끝나도록 디자인했으며, 가운데 중랑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의 영역을 감싸도록 했다. 피렌체에 파견된 첫 교황 사절이었던 발레리아나 추기경에 의해 1296년 9월 9일 첫 공사에 들어갔다. 이 방대한 프로젝트는 140여 년간 계속되었으며, 여러 세대에 걸친 노력이 필요했다.

 

1400년대 초 대성당의 원통형 부분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성단소 위의 42m의 넓은 공간은 1367년부터 이미 벽돌 모형이 존재했음에도 아직 팔각형의 돔(쿠폴라)을 갖고 있지 않았다. 1419년 아르테 델라 라나(양모 상인 길드)는 대성당 돔의 설계안을 공모하는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브루넬레스키가 당선되어 설계 의뢰를 맡게 된다. 석재 돔을 건설하는 것은 많은 기술적 문제를 일으켰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에 있는 판테온의 거대한 돔에서 영감을 얻으려 했으나, 콘크리트 사용법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브루넬레스키는 벽돌을 가지고 돔을 만들어야 했다.

 

브루넬레스키의 해결책은 천재적인 동시에 전례가 없었다. 지붕 위가 아니라 드럼에 얹혀졌으며 이중벽 구조의 8각으로 디자인된 독특한 형태의 돔으로, 지면으로부터 비계를 설치하지 않고 전체 돔을 만들 수 있었으며, 또한 이것은 홍예가 없이 건축된 최초의 커다란 돔이었다. 이 거대한 구조물의 무게는 37,000 톤이고 4백만 개 이상의 벽돌이 사용되었다. 그는 구조물을 만들면서 여러 모형과 세부 도면을 만들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특수한 기계를 만들었다. 이런 특별하게 설계된 기계들과 탁월한 석공 기술은 브루넬레스키의 건축에 있어서 극적인 공헌이었다. 가장 안쪽의 이중벽 안에 있는 원뿔 표면 위의 원을 베끼는 능력은 스스로 지탱하는 수평 아치의 건설이 가능하게 만들었고, 기하학적 이유로 원형의 평면은 이러한 건립 과정에 필요했다.

 

돔 공사는 1420년에 시작되어 1436년에 완성되었다. 대성당은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1436년 3월 25일 축성(祝聖)하였다. 이 돔은 역사상 최초의 팔각형 돔으로 (원형 돔인 로마의 판테온이 117년~128년 원형 돔으로 지지구조와 함께 지어졌음) 목재 지지구조 없이 지어졌고 그 당시 가장 거대한 돔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이다. 이 돔은 르네상스의 가장 인상적인 프로젝트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설계&nbsp;<초기 르네상스 교회당:&nbsp;피치 예배당>, 1430년경,&nbsp;피렌체

 

 

 

파치 예배당 내부

 

 

 

현관의 돔

 

파치 성당은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의 명문가인 파치(Pazzi)가를 위해 지은 작은 예배당의 정면이다. 이 건물은 고전적인 신전과 공통점이 없지만 고딕 양식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브루넬레스키는 원주와 벽기둥(pilaster)과 아치를 자기 식대로 결합하여 그 이전의 건물과는 전혀 다른 경쾌하고 우아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고전적인 박공을 가진 문틀과 같은 디테일을 보면 브루넬레스키가 얼마나 주의 깊게 로마의 판테온과 같은 고대의 유적들을 연구했는지 알 수 있다. 아치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그것이 벽기둥(납짝한 반쪽 기둥)이 나있는 위층에 어떻게 들어맞는지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미술의 영역에 있어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발견으로 그 뒤 수백 년 간 미술을 지배했던 원근법(遠近法, perspective)의 발견은 그의 업적이다. 단축법(短縮法, foreshortening)을 이해했던 그리스 미술가들이나 공간의 깊이를 능숙하게 표현했던 헬레니즘 미술가들 조차도 물체가 뒤로 물러갈 수록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그 크기가 작아진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고전기의 미술가들 중에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길이 지평선 상의 한 점으로 사라지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미술가들에게 이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하는 수단을 제공해 준 사람이 바로 부르넬레스키였다. 이것이 그의 화가 친구들에게 불러일으킨 흥분은 엄청났을 것이다.

 

마사치오 < 성 삼위 일체, 성모, 성 요한과 헌납자들>, 1425-1428년 경>, 프레스코, 667 X 317cm,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이탈리아 화가 마사치오(토마소 디 조반니·1401~1428)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 <성 삼위일체,성모, 성 요한과 헌납자들>’은 아직도 교과서 같은 그림으로 남아 있다.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발견한 원근법 원리를 적용한 최초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감성의 꽃’이라 불리는 미술에 수학 원리가 처음 적용된 ‘성 삼위일체’는 마사치가 1428년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왼쪽 벽면에 프레스코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양 옆에 서 있는 마리아와 성 요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성부, 그림을 기증한 부부를 원근법과 명암법으로 묵직하게 잡아냈다. 성부의 머리 위쪽에 모든 선이 하나로 연결되는 소실점이 있다.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들어 올리는 성부의 모습을 더 입체적으로 보이도곡 하기 위해서 빛과 색조의 효과를 십분 활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벽화가 너무나 입체적으로 보여 마사치오가 성당 벽에 구명을 냈다고 생각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을 보고 감탄하였으며 그 후 로마에서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정화를 그릴 때 이러한 원근법을 활용했다고 한다.

 

 

 

도나텔로(Donatello : 1386~1466)의 조각상

 
 

로마에서 고대 조각을 연구하고 일찍부터 명성을 얻었다. 작품 경향은 중세적 자연주의의 전통과 고전의 형태미에 의하면서 차츰 새로운 힘찬 사실주의로 발전하였다. 특히 원근법을 써서 입체감을 나타내어, 있는 그대로의 사실주의적인 표현에 힘썼다. <가타멜라타의 가마상>은 특히 뛰어나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는 기베르티, 브루넬레스키와 더불어 '르네상스 초기의 3대 조각가'로 불린다. 대표작으로 <성 게오르기우스 상> <다비드> 등이 있다.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 1415-16년 경, 오르 산 미켈레의 대리석 상. 209cm.피렌체

 

이 작품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날카롭게 바라보는 모습으로 망토를 어깨 위에서 브로치로 고정시킨 형태다. 두꺼운 목, 찌푸린 표정과 직시하는 눈, 꽉 다문 입 때문에 전체적으로 근엄해 보인다. 도나텔로는 부위별로 다른 조각기법을 사용했다. 망토는 조각칼을 옆으로 뉘어 대리석을 깎아 냄으로서 천의 질감을 나타냈고 얼굴은 소묘하듯 섬세하게 다듬었다. 반면 잘게 곱슬 거리는 머리카락은 대리석의 거친 면을 그대로 두었다. 이 조각상은 젊음의 혈기와 용기를 매우 탁월하게 표현한 모습으로 이 무사다운 성인을 이처럼 신선하고 신빙성있게 시각화한 도나텔로의 탁월한 재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조각상은 그것이 풍겨주는 생명감과 운동감에도 불구하고 그 윤곽이 분명하고 바위와 같이 단단하다. 도나텔로는 생존할 당시에 굉장한 명성을 얻었다. 백여년 전의 지오토와 같이 그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로 불려다니며 그 도시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클라우스 슬뤼테르 , < 예언자 다니엘과 이사야 >, 1396-1404. < 모세의 샘 > 의 부분 ,&nbsp; 석회석 ,&nbsp; 대좌를 뺀 높이&nbsp; 360 cm,&nbsp; 디종 샤르트롸즈 드 샹몰 예배당

 

 

 

다비드

 

1440년경의 청동 <다비드 상>은 독립 조상인데, 종래의 전통을 파괴하고 있다. 그 평정한 자태의 표현은 고대 양식의 충실한 번역이라 하겠다. 가느다란 팔과 딱딱한 체구에는 우미한 곡선은 없지만 그의 예리한 관찰로 미성숙한 남자상을 남김없이 포착하고 있다. 토스카나 지방의 목동이 쓰는 것과 같은 모자는 다소 기묘한 감을 주지만 그 비고전적인 면모에 내려진 음영에는 개인적이고 성격적인 것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특수성과 일반성의 결합이나 나체상에 비범한 인상을 부여하고 있다.

 

도나텔로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 1453년.

 

파도바의 산 탄토니오 성당 앞 광장에서 있는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1453)이다. 그가 로마에서 보았던 카피톨리노 언덕 위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을 본으로 한 것이다. 말 탄 자의 수직선, 장군이 가진 칼과 지휘봉으로 구성된 날카로운 대각선, 커다란 말의 수평적인 중량감 및 말의 네 발이 만드는 삼각형이 기묘한 교차를 보여 주고 있다. 왼쪽 앞발 아래에 있는 구슬은 물리적 평형을 갖기 위해서도, 대좌에서 전진하려는 말을 저지시키는 데에도, 실제상의 필요에서나 장식상에서나 다같이 조각상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인체와 마찬가지로 마체에도 해부학적인 정확함을 추구하였고, 다리와 코에 정맥이 부풀어 나오게 했고, 또 두부의 딱딱한 구조와 피부에도 극명한 현실의 관찰을 볼 수 있으며, 안장의 모포와 갑옷의 옷감 성질에 대해서까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둔중한 말처럼 보여 기사에 비례하여 너무 큰 것 같지만 완전 무장한 사람을 지탱하기에는 실제적으로는 이것조차 무리일지 모르겠다. 그는 갑옷과 안장에 풍부한 장식을 다는 것으로 기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커다란 말에 끌리기 쉬운 사람에게 주의를 쏠리도록 노력하였다. 한 사람의 유능한 장군의 풍모를 표현한 점에서 벌써 뛰어난 초상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나아가서 고전적 형식을 빌어 하나의 전형적인 인물을 구체화한 점으로 그것은 초상 이상인 것이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있는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그림과 달리  멀리 플랑드르의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 1390~1441)가 그린 헨트시의 성 바보(St. Bavo) 성당의 거대한 제단화는 예수를 상징하는 양(the Lamb)에의 경배라는 신비스런 광경을 중앙에 배치해 놓았다. 이 그림은 요한계시록의 한 구절(7장 9절)에 기초하여 구성되었다. " 그 뒤 나는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모인 군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자들로 옥좌와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 귀절은 교회에서 모든 성인들의 축제와 관련된 것인데, 이 그림에서는 더 많은 암시를 담고 있다. 중앙의 위쪽에 성부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마사초의 묘사만큼이나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지만 마치 교황처럼 눈부신 목좌에 앉아있으며 그 양 옆으로 예수를 최초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불렀던 세례자 요한과 성모가 앉아 있다.

 

그 위로 우리에게 친숙한 장면인 수태고지의 순간이 그려져 있는데, 이 성스러운 이야기를 묘사하는 반 에이크의 전혀 새롭고도 '세속적인' 표현 방식을 감지하려면 백년 전에 시모네 마리티니가 그린 제단화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반 에이크의 새로운 미술 개념을 무엇보다도 놀랍도록 보여 주는 부분은 타락 이후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다. 성경에는 선악과를 따 먹은 뒤에야  그들은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고 적혀있다.  그들은 손에 든 무화과 잎사귀에도 불구하고 정말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이다. 고대 미술가들은 밀로의 비너스 처럼 형상을 이상화했다. 반 에이크는 이런 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벌거벗은 모델들을 그의 앞에 세우고는 후세 사람들이 그의 지독한 정직성으로 인해 충격을 받게 될 정도로 그들을 충실하게 그렸다. 얀 반 에이크 형제는 오히려 량부르 형제 같은 미술가들의 방법을 추구해서 그것을 완벽한 경지로 이끌었기 때문에 중세 미술의 개념에서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하게 되었다.

 

자연에 대한 반 에이크의 관찰은 랭부르 형제보다 더 인내심이 있었고 새부 묘사에 관한 그의 지식도 훨씬 정확했다. 그림의 배경에 있는 건물과 나무들이 이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랭부르 형제의 나무는 상당히 도식화 되어 있고 인습적이다. 그들의 풍경은 실제의 광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배경이나 태피스리 처럼 보인다.  반면에 반 에이크의 그림에서는 진짜 나무를 보고, 도시로 이어지는 실제 풍경과 지평선 위에 있는 성이나 바위 위의 풀이나 가파른 돌산에서 자라는 꽃들을 그리는데 들인 무한한 인내심은 그 이전의 어떤 화가들도 시도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시도이다. 반 에이크는  그의 그림의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도 정확하게 재현하는데 골몰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말의 갈기에 있는 털이나 말탄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의 모피 장식의 터럭 수효까지도 다 셀 수 있을 것 같다. 물건이나 꽃, 보석 또는 천의 아름다운 표면을 묘사하는 데 뛰어난 작품들은 대개 북유럽의 화가, 특히 네델란드의 화가가 그린 것이고, 반면에 대담한 윤곽선과 원근법이 명확하며 인체의 아름다움을 확실하게 파악한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얀 반 아이크, <날개를 편 헨트 제단화>, 1432년, 패널에 유채, 각 패널 146.2 x 51.4cm, 헨트 성 바보 대성당

 

 

얀 반 아이크, <날개가 펼쳐진 헨트 제단화>

 

 

얀 반 아이크, <날개를 편 헨트 제단화>,의 세부 그림

 

 

 

중앙 내부 패널에서 본 위트레흐트 대성당의 전망

 

성모 마리아

 

성부 하나님 아버지

 

세례자 요한

 

천사의 합창단

 

천사들이 연주하는 현악기와 관악기

 

천사 합창단의 리더 천사의 세부 모습

 

아담

 

이브(Eve) : 여성 인물에 대한 현대적 이상

 

이브가 들고 있는 감귤

 

신비한 어린 양의 중앙 숭배 패널. 인물의 그룹은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남성 순교자, 이교도 작가와 유대인 예언자, 남성 성도, 여성 순교자입니다.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 모인 여성들의 그룹

 

생명의 샘

 

분수 오른쪽에 있는 그룹에 있는 세 인물은 Martin V,  Gregory VII, 및Antipope Alexander V 로 식별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 lunette에서선지자 미가의 세부 사항.

 

Erythraean Sibyl을 보여주는 세부 사항

 

Cumaean Sybil을 보여주는 세부 사항.

 

대천사 가브리엘

 

성모 영보

 

얀 반 에이크의 수태고지(1434~36)에서 보석으로 장식된 모스를 만지고 있는 대천사 가브리엘.

 

Jodocus Vijd (d. 1439) 겐트 시장

 

Lysbette Borluut (d. 1443), 겐트 시장 부인

 

어린 양 예수 그림, 복원 전과 복원 후의 모습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 1390~1441)의 아르놀피니의 약혼.

 

배경의 벽면에 걸린 거울 안에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뒷모습 외에도 결혼식의 증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특히 그 중 한 인물이 얀 반 에이크며, 이 결혼의 성립을 기록하고 증언하기 위하여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을 결혼식의 장면으로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결혼식에서 중요한 의식 중 하나인 남녀가 서로 손을 잡는 행위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신 앞에서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선서를 하는 것인데, 아르놀피니의 엄숙한 표정과 위쪽을 향해 들어 올린 오른 손은 그가 이러한 맹세의 의식을 행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의 마사치오나 도나텔로의 작품 못지 않게 새롭고 혁명적인 것이다. 현실세계의 단순한 한 구석이 마술처럼 갑자기 화면위에 정착되었다. 여기에는 온갖 것들이 다 있다. 카펫과 슬리퍼, 벽에 걸려있는 묵주,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솔, 창틀 위에 있는 과일 등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가 아르놀피리 부처의 집을 직접 방문한 것만 같다. 

 

 

조반이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 : 장사차 네델란드에 온 이탈리아&nbsp; 상인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의 이해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배경에 등장하는 여러 사물들에 관한 것이다. 가정집 내부의 평범한 가구나 물건처럼 보이는 각각의 사물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아르놀피니의 머리 위로 켜 있는 하나의 초는 신의 통찰력과 지혜, 혹은 결혼에의 맹세를 의미하고, 거울 우측 가구 기둥의 상단에 있는 나무 조각은 임신을 원하는 여성들의 수호성인인 성 마가렛이며, 강아지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신실함을, 바닥에 벗어놓은 신발은 결혼식이 수행되는 공간의 신성함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촛불이 켜진 등잔 : 하나의 촛불은 결혼에의 맹세를 의미한다.

 

 

이 젊은 여인은 그녀의 오른 손을 아르놀피니의 왼손 위에 얹었고  아르놀피니는 그들의 결합의 엄숙한 표시로서 그의 오른 손을 그녀의 왼손 위에 놓으려는 순간이다. 이런 엄숙한  행위의 현장에 있었다고 증언하는 공증인과 같이, 아마도 이 화가는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 이 중요한 약속을 기록해달라고 요청을 받았을 것이다. 

 

 

거울 속에 신랑 신부의 모습과 결혼식의 증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뒤의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서 그 장면이 모두 반영되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목격자가 확실하다고 인정하는 사진을 법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는데, 그림을 이런 새로운 방식으로 이용하는 것을 생각해낸 사람이 이탈리아의 상인인 아르놀피니인지 아니면 북유럽의 미술가 반 에이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창안해낸 사람이 누구이던 간에 그는 분명히 반 에이크의 새로운 회화 방식이 지닌 엄청난 가능성들을 재빨리 이해했음에 틀림없다.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가가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한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아르놀피니의 신부인 잔느 드 쉬나니(Jeanne de Chenany)

 

"Johannes de eyck fuit hic. 1434" ("얀 반 에이크가 입회했노라. 1434년")

이 화가가 그림에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라틴어로 'Johannes de eyck fuit hic(얀 반 에이크가 입회했노라)'라고 그의 이름을 써넣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당시 유럽 전역에서 그 당시의 미술가들은 진실을 정열적으로 탐구하는 데 있어서 미에 대한 구세대의 낡은 개념을 거부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나이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미술가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사람으로 스위스 화가 콘라드 비츠(Conrad Witz : 1400~1446)를 들 수 있다. 그는 1444년에 제네바 시를 위해서 그린 제단화가 있다. 이 그림은 성 베드로에게 봉헌된 것으로서 성경의 요한복음(21장)에 실린 대로 예수가 부활한 뒤에 성 베드로를 만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몇 명의 사도들과 그들의 동료들이 티베리아 호수로 고기를 잡으러 나갔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 날이 밝았을 때 예수는 해변에 서 있었으나 아무도 그가 예수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는 어부들에게 그물을 배의 오른 쪽으로 던지라고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고기가 어찌나 많이 잡혔던지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큰 물고기만 세어보아도 153마리가 잡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 순간에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주님 이시다"라고 말했다. 베드로가 이 말을 듣자 " 겉옷을 두르고(그는 벌거벗고 있었기 때문에)그냥 물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배를 저어 육지로 나왔다.

콘라드 비츠 , < 제자들로 하여금 고기를 잡게 하신 기적 >, 1444 년 ,&nbsp; 제단화의 패널 ,&nbsp; 목판에 유채 , 132 x 154cm,&nbsp; 제네바 박물관

 

이 그림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신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기 전 자신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 생업에 열중했습니다. 예수께서 처형 당하신 후, 유대인들이 무서워 다락방에서 꽁꽁 숨어있던 제자들은 자신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뵙고 기뻐’하였음에도, 그리고 성령의 숨결을 주시며 그들을 파견하셨음(요한 20,19-23)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돌아간 곳은 자신들의 생업현장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하고  도마에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했던 그들이 말입니다.

요한 복음의 저자는 왜 하필 153이라는 숫자를 제시했을까? 먼저 <고백록>으로 유명한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요한 복음서를 해설해 놓은 <요한 복음서에 관한 연구>(in evangelium joannis tractatus)에서 “1부터 17까지를 차례로 더하면(1+2+3+4+…+16+17) 그 합이 153이다. 17은 7과 10이 더해진 숫자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모두에서 숫자 3과 더불어 모두 완벽성, 무한함을 의미한다. 이 숫자는 은총의 무한성을 상징하며 또한 이 은총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