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르네상스 미술의 전성기 - 빛과 색채, 16세기초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미술(2)

무역을 통해 동방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던 베네치아는 르네상스 양식, 즉 건축에 고전적인 형식을 적용한 브루넬레스키의 방식을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보다 늦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단 르네상스 양식을 받아들인 후에는 새로운 경쾌함과 따뜻함이 이 양식에 더해져서 근대의 다른 어떤 건축 양식보다 더욱 밀접하게 헬레니즘  시대의  대상업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나 안티오크의 장대함을 연상케  해 주고 있다. 이 양식의 가장 특징적인 건물중의 하나는 산 마르코(San Marco) 성당의 도서관이다. 이 건물을 지은 건축가는 피렌체 출신의 야코프 산소비노(Jacopo Sansovino : 1486 - 1570)인데 그는 자신의 양식과 작품을 그 도시 특유의 분위기, 즉 환초로 둘러싸인 해변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화려한 베네치아의 밝은 빛에 어울리도록 완벽하게  적응시켰다. 활기 넘치는 도리아 식 원주(圓柱)를 가지고 있는 건물 아래층은 가장 정통적인 고전 양식을 채용하고 있다. 산소비노는 콜로세움에서 볼 수 있는 건축의 법칙을 많이 따르고 있다.  그는 이와 동일한 전통을 고수해서 이오니아 식으로 건물 위층을 꾸밀 때도 난간을 얹고 또 그 위에는 조각상들을 배열한 소위 아티카(attica : 건축에서 조각상들을 놓는 대좌 구실을 함)를 갖추어 놓았다.

 

야코포 산소비노,<산 마르코 대성당의 도서관>,1536년. 전성기 르네상스의 건물,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도서관>

 

그러나 산소비노는 기둥 양식들 사이의 아치 형태가 콜로세움의 경우에서처럼 기둥위로 놓이지 않고 또 다른 한 쌍의 가늘고 작은 이오니아 식 원주로 받치게 함으로써 상이한 기둥 양식들이 서로 엉켜 풍요로운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건물에 난간과 꽃 장식과 조각상들을 이용하여 고딕 시대의 베네치아 건축의 정면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트레에서리를 연상시키는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은 친퀘첸토의 베네치아 미술을 유명하게 만든 이 도시 특유의 취향을 보여준다.

사물의 예리한 윤곽을 희미하게 만들고 휘황찬란한 빛 속에 사물의 색채들을 뒤섞이게 하는 환초로 둘러싸인 해변의 분위기가 이 도시의 화가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이 해왔던 것보다 더 신중하고 민감하게 색채를 사용하게 하였다.

 

피렌체의 우대한 개척자들은 색채보다는 소묘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그림이 색채면에서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그림속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형태들을 하나의 통일된 구성으로 결합시키는데 색채를 주된 수단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던 화가는 매우 더물었다. 그들은 채색하기 전에 원근법이나 구도로서 그러한 통일된 구성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색채를 그림 위에 덧붙이는 부가적인 장식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베네치아에 있는 산 차카리아의 작은 교회에 가서 위대한 베네치아의 화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 1431- 1516)가 그의 말년기인 1505년에 제단에 그린 그림 앞에 서보면 색채에 대한 그의 접근법이 매우 달랐다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조반니 벨리니, < 성모와 성인들>, 1505년, 제단화, 목판에 유채, 캔버스에 모사. 402 X 273cm, 베네치아, 산 차카리아 성당.

 

위 그림이 특별히 밝거나 화려하기 때문이 아니고 그보다는 그림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도 전에 부드럽고 다채로운 색채들이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위 그림에서 보자면 성모 마리아가 앉아있는옥좌가 놓인 황금색의 빛나는 벽감에서 넘쳐흐르는 따뜻한 분위기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성모의 팔에는 제단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해 손을 들고 있는 아기 예수가 안겨있다. 천사 한 사람이 제단 밑에서  조용히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고 성인들은 옥좌의 양편에 조용히 서 있다. 성 베드로는 열쇠와 책을 들고 있으며 성 카타리나는 순교의 상징인 종려나무 잎과 부러진 형틀을 들고 있다. 성 아폴로니아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학자여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성 히에로니무스가 보인다.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상은 그 이전이나  그 뒤로도 이탈리아 및 기타 다른 곳에서 많이 그려졌지만 이러한 품위와 차분함으로 표현된 그림은 거의 없다.

 

벨리니는 그림의 질서를 깨트리지 않고 이 단순한 대칭적인 구도속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또한 성모와 성인들의 전토적인 모습을 그 신성함과 위엄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 사실적이고 살아있는 것처럼 변화시키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꿈꾸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성 카타리나와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늙은 학자인 성 히에로니무스는 각기 그들 나름대로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이 그림 속 인물들은 보다 더 조용하고 아름다운 세계, 즉 이 그림을 꽉채우고 있는 충만한 따뜻함과 초자연적인 빛이 스며든 세계에 소속된 사람들 처럼 보인다.

 

베네치아의 화가들이 색채와 빛을 그처럼 행복하게 사용하여 화면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한 조반니가 보여준  모범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화가 조르노네(Giorgione : 1478-1510)는 바로 이런 영역에서 가장 혁명적인 업적을 이룩했다.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그의 작품도 5점 밖에 없다. 그러나 이 다섯 점의 그림들 만으로도 그는 새로운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에 못지 않는 명성을 널리 알렸다. 아래의 <폭풍우>라는 그림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고전 작가나 고전을 모방한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한 장면을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베네치아 미술가들은 그리스 시인들과 그들이 추구했던 것의 매력에 눈을 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원의 사랑을 다룬 목가적인 이야기나 비너스와 요정들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조르조 다 카스텔프랑코 (Giorgio da Castelfranco) 1478 - 1510, 국적 : 이탈리아 사조 : 르네상스, 베네치아파

 

조르조네의 '카스텔프랑코의 성모' 출처 : WIPNEWS(http://www.wip-news.com).

 

조르조네의 초기작에 속하는 1503년 작품 ‘카스텔프랑코의 성모’의 경우, 베네치아풍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앞쪽에 두 성자가 위치해 있고 상단 가운데 마돈나가 위치해 삼각형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훗날 베네치아풍을 상징하는 구도가 되었다. 또한 기법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데, 스케치 및 소묘를 통해 확실히 선이 두드러지는 피렌체 화풍과 다르게 드로잉 없이 그리는 기법인 ‘Pittura sanza disengno’를 사용했다. 그리고 1500년 베네치아를 방문해 알게 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를 통해 알게 된 스푸마토 기법도 사용되었다.

조르조네, <폭풍우>, 1508년경, 캔버스에 유채, 82 X 73cm,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이 그림의 이야기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추측컨대는 장래에 영웅이 될 아기의 어머니가 도시에서 쫓겨나 항야에 버려졌는데 마침 친절한 젊은 목동을 만나게 된다는 내용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그림이 미술사상 가장 훌륭한 작품의 하나로 손꼽히는 것은 이 그림을 통해 그의 혁명적 업적의 편린을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인물들이 특별히 세심하게 그려진 것도 아니고 구도에서도 별다른 기교가 엿보이진 않지만 화면 전체에 스며있는 빛과 공기에 의해서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조르조네가 그의 선배나 동시대 화가들과는 달리 사물과 인물을 나중에 공간 속에 배치한 것이 아니라 땅, 나무, 빛, 공기, 구름 등의 자연과 인간을 그들의 도시나 다리들과 더불어 모두 하나로 생각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원근법의 창안과 맞먹는 새로운 영역을 향한 하나의 발 돋움이었다. 그 이후로 그림은 그 자체의 비밀스런 법칙과 방안을 갖는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조르조네의 '세 학자들' [사진제공 : Wikipedia] 출처 : WIPNEWS(http://www.wip-news.com)

 

1509년 완성한 대표작 ‘세 학자들(The Three Philosophers)’도 마찬가지다. 앉아있는 젊은 철학자와 중간에 가장 높이 서 있는 아랍 의상의 철학자 그리고 가장 늙고 수염이 많이 긴 오른쪽 철학자가 삼각구도를 형성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오른쪽 늙은 철학자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로 중간의 아랍의상 철학자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있으며, 절은 철학자는 등을 진 채 왼편의 동굴을 바라보고 있어 ‘플라톤의 동굴’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불명확한 해석을 떠나 부드러운 화풍과 뒤편의 풍경이 다시 한번 등장해 조르조네의 그림임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조르조네, <잠자는 비너스> 조르조네의 죽음으로 미완성 상태의 그림을 티치아노가 완성시켰다.

 

이후 조르조네는 1510년 안타깝게도 당시 유행한 무서운 전염병 흑사병(Plague)으로 인해 사망하는데, 함께 미술을 배웠던 티치아노에 의해 그의 마지막 유산과도 같은 그림 ‘잠자는 비너스(Sleeping Venus)’가 완성되었다. 처음 티치아노가 그림을 확인했을 때는 나체 여성은 완성되었지만, 배경이 미완성 상태였다. 조르조네가 항상 그림에 등장시킨 뒷 배경의 풍경을 완성시킨 티치아노는 훗날 조르조네의 작품과 유사한 구도의 나체 그림을 완성하기도 했다. 바로 1538년 티치아노의 작품 ‘우르비노의 비너스’다. 구도는 똑같이 그렸지만, 배경은 실내로 묘사했다. 이후 이런 구도는 마네의 ‘올랭피아’ 그림까지 이어졌다.

비록 33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베네치아파의 가장 핵심적인 유산을 남긴 ‘조르조네’. 그림에 있어 구도는 명암과 색을 비롯해 가장 중요한 3대 요소다. 그가 남긴 회화 작품에서의 구도는 르네상스 베네치아를 넘어 전 세계 근대미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조르조네의 작품을 통해 명화에서 느낄 수 있는 고유한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조르조네는 이 위대한 발견의 모든 결실을 얻지 못하고 너무도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성과는 모든 베네치아 화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티치아노(Tiziano : 1485-1576) 를 통해 얻게 되었다. 티치아노는 알프스 남부의 카도레에서 출생하였는데 그가 흑사병으로 죽을 때는 99세 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긴 생애 동안에 그는 미켈란젤로의 명성만큼이나 유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티치아노는 레오나르도와 같은 박식한 학자도 아니었고, 미켈란젤로와 같은 뛰어난 인물도 아니었으며 라파엘로와 같은 다재다능한 매력적인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는 한 사람의 화가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물감을 다루는 솜씨는 미켈란젤로의 거침없는 소묘 솜씨에 필적하는 그런 화가였다. 이런 뛰어난 솜씨가 그로 하여금 전통적인 구도의 모든 규칙을 무시하게 했으며 파괴한 듯이 보이는 통일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색채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아래 그림을 보면 그의 미술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조반니 벨리니의 그림 <성모와 성인들>보다 약 15년 뒤에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그러나 조반니 벨리니의 그림에서처럼 성모 마리아를 그림의

중앙에 두고 시중드는 두 성인을 대칭되게 배치한 것이 아니라 성모를 그림의 중심에서 이동시켰으며 두 성인을 이장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였는데 이것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일이었다. 이 두 성인은 십자가의 성흔으로 보아 알 수 있는 성 프란체스코와 성모의 왕좌에 아래의 계단에 열쇠(권위의 상징)를 놓고  있는 성베드로이다. 이 그림은 베네치아의 귀족 야 코포 페사로가 터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감사하는 기념으로 기중한 것이었다.

 

티치아노는 페사로를 성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렸고 갑옷을 입은 기수 한 사람이 터키 군 포로 한 명을 뒤에서 끌고 오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성베드로와 마리아는 인자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고 맞은 편의 성 프란체스코는 그림의 한 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페사로의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아기 예수의 시선을 돌리게 하고 있다. 전체 장면은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구름을 뚫고 치솟아있고 구름 위에서 작은 두 천사들이 장난치듯 십자가를 세우는 데 열중하고 있다. 티치아노 시대의 사람들은 구도의 오래된 규칙들을 과감히 뒤엎은 그 대담성에 놀랐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러한  그림이 한쪽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 예기치 않은 구도는 전체적인 조화를 깨트림 없이 오히려 그림을 생기있고 활기차게 만들었다.

 

티치아노 <성모와 성인들과 페사로 일가>, 1519-1526, 제단화, 캔버스에 유채, 478X266cm,베네치아 산타마리라 데이 프라리 성당.

 

그것은 티치아노가 빛과 공기와 색채로서 이 장면을 통일시켰기에  가능하였다. 단순한 깃발 하나를 가지고 성모의 모습과 대칭을 이루게 한다는 생각은 아마도 그전 세대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풍요롭고 따뜻한 색채를 가지고 있는 이 깃발은 그 같은 모험을 완전한 성공으로 이끈 놀랄만한 부분이다. 

티치아노 <성모와 성인들과 페사로 일가> 그림의 일부 부분.

 

티치아노가 당대에 그처럼 큰 명성을 얻은 것은 초상화 때문이었다. 그의 초상화의 매력을 알려면 일명 <젊은 영국인>이라고 불리우는 아래의 그림에 있어 초상화의 머리 부분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그림에는 레오나르도의 <모나 리자>에서 보는 바와 같은 세밀한 입체감의 묘사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무명의 젊은 영국인은 모나리자 처럼 신비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꿈에 잠긴 듯한 눈동자자는 거친 캔버스 위에 물감을 한 점 발라놓은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영혼이 담긴 강렬한 표정으로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 같다. 권력자들이 이 거장에게 초상화를 그려받는 영광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티치아노가 실물보다 특별히 더 좋게 그리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예술을 통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티치아노 < 한 남자의 초상, 일명 ' 젊은 영국인' >, 1540-5 년경, 캔버스에 유채 , 111 x 93 cm, 피렌체 피티궁.

 

 

티치아노 < 한 남자의 초상, 일명 ' 젊은 영국인' >의 일부.

 

 

 

나폴리에 있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초상 앞에 서보면 그들은 정말 영원히 살아가고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이 그림은 교회의 늙은 통치자가 그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젊은 친척, 알겟산드로 파르네세를 돌아다 보고 있고 알렉산드로의 동생 오타비오는 조용히 우리를 쳐다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티치아노는 이 그림보다 약 28년 전에 라파엘로가 추기경들과 함께 있는 교황 레오 10세를 그린 초상화를 분명 알고 있었고 또 감탄했을 테지만 그는 보다 더 생생한 특성을 강조하여 라파엘로의  그림을 능가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이 세사람의 만남이 너무나 설득력 있고 또 극적이므로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추축해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추기경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황이 그들의 음모를 꿰뚫어 보고 있지는 않을까? 아마 이런 것은 근거 없는 질문이 되겠지만 당시의 사람들로서도 이 그림 앞에서 이러한 의문이 일어나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 티치아노가 황제 카를 5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를 떠나 독일로 그의 초상을 그리러 갔기 때문에 이 그림은 미완성 상태로 남게 된다. 미술가들이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방법의 발견을 위해서 정진한 것은  비단 베네치아와 같은 대도시에서 뿐만은 아니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소읍인 파르마에서도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16세기 초기의 이탈리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과감한 혁신가로 평가되었던 한 화가가 외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일명 코레조(Correggio)라 불리운 안토니오 알레그리(Antonio Allegri : 1489 - 1534)였다. 코레조가 그의 대표작들을 그렸을 때 이미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는 사망했고 티치아노는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당대의 미술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아마도 그는 북부 이탈리아의 인근 도시들에서 레오나르도 제자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그의 명암법을 배울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후대의 여러 유파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완전히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 명암법에 관한 것이었다. 아래의 그림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중의 하나인 <거룩한 밤>이다. 키가 큰 목동이 이제  막 하늘이 열리면서 천사들이 '높은 곳에 계신 하느님께 영광을' 하고 노래하는 환영을 본다. 천사들은 기분 좋게 구름을 타고 다니면서 긴 지팡이를 든 목동이 급히 들어오는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목동은 허물어진 마굿간의 어둠 속에서 기적을 본다. 갓 태어난 아기 예수가 사방에  빛을 발하고 있으며 행복한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을 밝게 비추고 있다. 목동은 동작을 멈추고 무릎을 꿇고 경배하기 위해서 그의 모자를 만지고 있다. 그 옆에는 하녀가 두 사람 있는데 한 사람은 구유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눈이 부신 듯하며 다른 하녀는 행복한 표정으로 목동을 쳐다보고 있다. 성 요셉은 어둑어둑한 바깥에서 나귀를 돌보는 데 열중하고 있다. 

 

첫눈에는 이와같은 배치가 기교가 없으며 우연한 것 같이 보인다. 왼쪽의 복잡한 장면에 대응하는 군상(群像)들이 오른 쪽에는 없으므로 균형이  잡혀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성모와 아기 예수에게 빛을 던져 강조함으로써 전체 그림은 균형을 이루게 된다. 코레조는 색과 빛을 사용하여 형태에 균형을 주고,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발견을 티치아노보다 더욱 잘 활용하였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장면으로 목동과 함께 달려가 요한 복음서가 전하는 어둠 속을 비추는 '빛'의 기적을 보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코레조,<거룩한 밤>, 1530년경. 목판에 유채. 256 X 188cm, 드레스덴 고미술 갤러리

 

 

코레조 < 성모의 승천 : 파르마 대성당의 천장화를 위한 습작>, 1526년경. 종이에 빨간색 분필, 27.8 X 23.8 cm, 런던 대영 박불관.

 

위 그림은 자신을 맞이하는 하늘의 광채를 올려다 보며 구름 위로 승천하고 있는 성모의 형상을 위한 첫 구상을 보여준다. 이 소묘는 훨씬 더 왜곡되어 있는 프레스코 화의 형상보다 확실히 이해하기가 쉽다. 게다가 코레조가 단지 몇 번의 분필 자국만으로 그처럼 넘쳐흐르는 빛을 암시할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단순한 회화 수단을 구사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코레조, <성모의 승천> 프레스코, 파르마 대성당의 둥근 천장

 

파올로 베로세네<베네치아&nbsp; 화가들의 오케스트라 : 가운데 부분은 가나의 혼인 잔치를 묘사하고 있다. 1562-1563. 캔버스에 유채.오른 쪽 부터 티치아노, 틴토레토, 야코보 바사노, 파올로 베로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