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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확산 - 16세기 초 독일과 네덜란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거장들이 이룩해놓은 위대한 업적들과 창안들은 알프스 북쪽에 사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들이 이탈리아 거장들의 위업이라고 지칭할 수 있었던 것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로 그것은 과학적인 원근법의 발견과 둘째로 아름다운 인체를 완벽하게 표현하도록 하였던 해부학에 관한 지식, 그리고 세번째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품위 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고전시대의 건축 형식에 관한 지식이었다.이에 대해 알프스 북쪽의 유럽의 여러 미술가들이 어떻게 굴복했는지를 살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아마도 건축가들이 가장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고딕 양식과 새로이 부활한 고대 건축 양식은 모두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대단히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것이지만, 그 목적과 정신에 있어서는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알프스 이북의 건축에서 이 새로운 유행을 채택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새로운 유행은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자 원했던 군주들과 귀족들의 줄기찬 요구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도 건축가들은 이런 새로운 양식의 요구를 매우 피상적으로만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원주(圓柱)나 프리즈를 여기저기에 갖다 붙이는 식으로,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풍부한 장식적인 모티프에 약간의 새로운 고전적인 형식을 가미함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건축에 이념에 대한 그들의 지식을 과시했다. 건물의 본체는 고딕 식으로 전혀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프랑스나 영국, 독일에서는 궁륭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 주두(柱頭)를 달아서 외면상으로는 원주로  변형시키거나, 트레이서리로 완성된 고딕 식 창문의 뾰족한 아치를 둥근 형태의 아치로 바꾼 교회들이 있다.

 

피에르 소이에, <캉의 성 피에르 성당 성가대석>, 1518-45년, 변형된 고딕 양식

 

 

피에르 소이에, <캉의 성 피에르 성당>, 1518-45년, 변형된 고딕 양식 ​

 

또한 환상적인 병(瓶) 모양의 원주들을 지닌 수도원들도 있고 소탑(小塔)과 부벽(扶壁)들이 촘촘히 세워져 있지만 고전적인 디테일로 장식된 성(城)들도 있으며 고전적인 프리즈들과 흉상들로 박공 구조를 이룬 도시의 주택들도 있다. 고전적인 규칙이 완벽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건축가들은 이런 북방 건축물들을 본다면 혐오감으로 등을 돌렸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이런 건물들을 현학적인 아카데믹한 기준으로 평가하고자 하지만 않는다면 이 조화롭지 못한 양식에 포함된 창의력과 기지를 보고 감탄하게 될지도 모른다.

얀 발로트와 크리스티안 지크스데니에르스, <브뤼주의 구 관청(재판소 서기과)>, 1535-7년, 북유럽의 르네상스 건물

 

 

얀 발로트와 크리스티안 지크스데니에르스, <브뤼주의 구 관청(재판소 서기과)>

 

그러나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상당히 달랐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우는 원주나 아치와 같은 어떤 분명한 형식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군소화가들만이 그들이 입수한 이탈리아의 판화에서 인물의 형태나 제스쳐를 빌려오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그러나 진정한 미술가라면 미술의 새로운 원칙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그 원칙의 유용성에 대해서 자기나름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독일의 위대한 미술가인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 1471-1528)의 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극적인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평생동안 미술의 장래를 위해서 이 새로운 원칙들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헝가리에서 이주하여 번창하는 도시 뉘른베르크에 정착했던 유명한 금세공가의 아들이었다. 그는 일찌기 소년 시절부터 소묘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으며 제단화와 목판화 삽화를 제작하는 가장 큰 공방에서 수습 기간을 보냈다.이 공방은 뉘른베르크의 거장 미하일 볼게무트(Michel Wolgemut)가 운영하는 것이었다. 수습을 마친 뒤에 그는 중세의 모든 젊은 장인들의 관례에 따라 장인으로서의 시야를 넓히고 정착할 곳을 찾아 여행길에 올랐다.  뒤러는 그 당시의 가장 유명한 동판화가인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의 공방을 방문하는 것이 그의 오랜 생각이었으나 그가 콜마르에 도착했을 때는 그 거장이 사망한 지 수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래도 그는 그 공방의 운영을 맡은 숀가우어의 형제들과 상당한 기간동안 함께 지낸 뒤 당시 학문과 서적 교역의 중심지였던 스위스의 바젤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목판화 삽화를 그리다가 다시 여행을 계속하여 이번에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부 이탈리아로 갔다.

 

여행중에 그는 사물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고 알프스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수채화로 옮기기도 하고 만테냐의 그링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결혼을 하고 공방을 열기 위해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북유럽의 미술가가 남유럽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기법적인  성과들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얼마 안가서 그는 미술가라는 어려운 직업에 요구되는 단순한 기술적인 지식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으며 또 위대한 미술가가 될 수 있는 강렬한 감정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었다. 그의 초기 걸작 가운데 하나는 성 요한의 계시록을 묘사한 일련의 대형 목판화였다. 그것은 즉각 성공을 거두었다.  최후 심판날의 공포와 그에 앞선 여러 가지 징후와 불길한 조짐들의 무시무시한 광경이 이처럼 힘있고 강력하게 시각화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뒤러의 상상력과 대중들의 관심은 중세 말엽 독일에서 무르익어 결국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폭발한, 교회 제도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과 불만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브레히트 뒤러, <13세의 자화상>, 1484, 종이에 은필로 소묘.

 

                        알브레히트 뒤러, <용과 싸우는 성 미가엘>, 1498년, 목판화, 39.2 X 28.3cm

 

뒤러와 그의 작품을 보는 당시의 대중들에게는 이 요한 계시록의 무시무시한 환영들이 대단한 화젯거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언들이 그들의 생전에 현실로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위의 그림은 요한 계시록 12장 7절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그때 하늘에서는 전쟁이 터졌습니다. 천사 미가엘이 자기 부하 천사들을 거느리고 그 용과 싸우게 된 것입니다. 그 용은 자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맞서 싸웠지만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그들이 발붙일 자리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 위대한 한 순간을 표현하기 위하여 뒤러는 종래의 전통적인 포즈를 모두 버렸다. 살려둘 수 없는 적과 싸우는 영웅을 종래와 같이 우아하고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던 것이다. 뒤러의 성 미가엘은 일정한 포즈를 취하며 공격을 감행하지  않는다. 그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분투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큰 창으로 용의 목을 찌르려고 필사의 힘을 다해 두 손을 사용하고 있고 그 힘찬 몸짓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의 주위에 있는 한 무리의 천사들이칼과 활을 들고 악귀와 같은 괴물과 싸우고 있는데 이 괴물의 끔찍스러운 모습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다. 이 천상의 싸움터 아래에는 뒤러의 유명한 서명과 함께 고요하고 평온한 풍경이 전개되어 있다.

 

뒤러는 환상적이며 환영적인 세계를 그리는 거장이며 또한  대성당들의 현관을 창조했던 고딕 미술가들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증명해 보여주었지만 이러한 업적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북유럽의 미술가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자연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었던 얀 반 에이크 이래, 지금까지 어떤 예술가가 했던 것보다 더 끈기있게, 그리고 더 충실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음을 그의  습작이나 스케치를 통해 알 수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풀밭>, 1503년, 수채화습작, 종이에 펜과 잉크 및 연필과 담채, 40.3 X 31.1cm,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

 

알브레히트 뒤러 <산토끼>, 1502년. 종이에 수채와 구아슈. 25 X 22.5 cm,빈 알베르티나.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유화와 동판화와 목판화로 삽화를 그려야 했던 성경의 이야기를 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스케치를 그리게 했던 그러한 인내력은 또한 그를 타고난 동판화가로 만들어 주었다. 그는 동판화 속에 하나의 진정한 소우주를 만들어내기 위해 세부에 세부를 더해 나가는 치밀한 작업에 한번도 진력을 내는 일이 없었다. 1504년에 완성된 <예수 탄생>에서 뒤러는 숀가우어가 그린 동판화를 그대로 모사했다. 숀가우어는 이미 허물어진 외양간의 울퉁불퉁한 벽을 애정을 가지고 묘사했었다. 얼핏 보면 뒤러의 동판화에는 이것이 바로 주제인 것 같이 보인다. 금이 간 회벽, 맞물리지 않는 기왓장들, 부서진 틈바구니에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벽, 지붕 대신 씌운 너덜너덜한 나무 판대기들, 그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새들....이런 낡은 농가를 생각해내고 대단히 조용하고 명상적인 인내심을 가지고 표현 한 것으로 보아 우리는 이 예술가가 그림 같은 낡은 건물에 대한 착상을 얼마나 만족스럽게 생각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예수 탄생>, 1504년, 인그레이빙, 18.5cm &times; 12cm

 

그것과 비교해볼 때 인물들은 정말 작고 거의 중요치 않게 보인다. 이 그림을 보면 낡은 헛간에 쉴 자리를 마련한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며 요셉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좁은 물통에 붓느라고 분주하다. 배경에서  경배를 올리고 있는 목동 한 사람을 찾아내려면 대단히 세심하게 그림을 음이해야 하며  또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는 전통적인 천사의 모습을 하늘에서 찾아보려면 확대경이 있어야 할 판이다. 그런데도 뒤러가 단지 낡고 무너진 담장을 꼼꼼히묘사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예수 탄생 1502 /1504, 목판화, 29.9 x 21.1 cm

 

 

이 초라한 방문객들과 더불어 낡고 버려진 농가의 앞마당은 대단히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전달해주므로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 동판화를 만들 때 쏟은 뒤러의 경건한 명상 속에 동참하여 성탄 전야의 기적을 곰곰히 생각하게 만든다.  이와같은 동판화에서 뒤러는 미술이 자연의 모방을 추구하기 시작한 이래로 고닥 미술의 발전을 총합하고 완성시킨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마음은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부여한 새로운 목적에 고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고딕 미술이 거의 도외시 되었으나 이제 관심의 전면으로 부상한 새로운 목적은 바로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인체의 표현이었다. 여기에서 뒤러는 반 에이크의 <아담과 이브>같이 꼼꼼하고 충실하게 묘사된 경우조차도 실제 자연에 대한 단순한 모방이 남유럽 미술 작품들을 돋보이게 하는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의 요소들을 창조해내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알브레히트 뒤러, <아담과 이브>, 1504년, 인그레이빙, 24.8 X 19.2cm ​

 

렘브란트, <아담과 이브>, 인그레이빙

 

라파엘로는 이러한 문제에 당면했을 때 마음 속에서 또오르는 아름다움의 '어떤 이념'에 비추어 답을 구했는데, 그 이념은 그가 고전적인 조각과 아름다운 모델들로 수년 간 연구하는 동안에 익힌 것들이었다. 뒤러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공부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그를 지도해줄 확고한 전통이나 확실한 직관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가르쳐줄 수 있는 확실한 법칙을 찾아나서게 된다. 그는 인체의 비율에 관한 고전 시대의 저술을 통해 그러한 법칙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인들의 표현과 비례 측정은 다소 모호했으나 뒤러는 그러한 난제 때문에 단념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그는 선배들(미술의 규칙에 관한 분명한 지식 없이도 활력이 넘치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던 선배들)의 모호한 관행에 가르칠 수 있는 적절한 근거를 부여하려고 의도했다.

 

여러가지 비례의 법칙에 대한 뒤러의 실험을 살펴보면 매우 재미있다. 그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하여 인체를 과도하게 길게,  또는 넓게 그림으로써 인간의 체격을 일부러 왜곡시켰다. 평생동안 몰두했던 이러한 연구의 첫번 째 결과 가운데 <아담과 이브>를 그린 동판화가 있다. 이 그림에서 그는 아름다움과 조화에 관한 그의 모든 생각들을 구현하고 자랑스럽게 그의 라틴어 이름으로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 1504 그림"(ALBERTUS DURER NORICUS FACIEBAT 1504)이라고 서명했다. 이 동판화에 담겨 있는 업적들을 당장에 알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화가는 앞에서

예를 든 그의 작품에서보다 그에게 친숙하지 않은 조형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컴퍼스와 자를 가지고 그렇게부지런히 재고 균형을 맞추어서 도달한 조화로운 형태들을 이탈리아나 고전 작품의 모델만큼 신빙성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다. 그들의 형태와 자세뿐만 아니라 또한 대칭적인 구도에 있어서도 다소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나 맨 처음 느낀 이러한 어색함은 뒤러가 다른 미술가들과는 달리 새로운 우상을 숭배하기 위하여 그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그의 안내를 받아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보면 거기에는 생쥐가 고양이 옆에 조용히 누워있고, 엘크 사슴과 암소와 토끼가 앵무새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이 숲속을 더 깊이 들어가보면 거기에는 지식의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뱀이 이브에게 선악과를 주고 있을 때 아담은 그것을 받으려고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뒤러가 울퉁불퉁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의 어두운 그늘을 배경으로 희고 섬세하게  모델링된 인체의 분명한 윤곽을 돋보이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남유럽 미술의 이상을 북유럽의 토양에 이식시킨 최초의 진지한 시도에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뒤러 자신은 그렇게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 동판화를 제작한 다음해에 그는 견문을 넓히고 남유럽 미술의 비밀에 관해 더 많이 배우기 위해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처럼 유명한 경쟁자의 도착을 베네치아의 군소 미술가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뒤러는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게는 이탈리아 사람들 중에 많은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은 나에게 이탈리아 화가들과는 함깨 먹거나 마시지 말라는 충고를 한다네. 대부분의 이탈리아 화가들은 나의 적이라 할 수 있지. 그들은 교회건 어디건 내 작품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그것들을 모사하고는 내 작품이 고전적인 양식으로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비난을 한다네. 그러나 조반니 벨리니는 많은 귀족들 앞에서 나를 높이 평가해 주었네. 그는 내가 그린 작품을 가지고 싶다고 직접 나를 찾아와서 무엇인가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했네. 그것도 보수를 두둑히 준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는 대단히 신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하네. 그것이 나로 하여금 그 사람을 좋아하게 만들었다네. 그는 대단히 나이가 많은 분이지만 그림에 있어서는 아직 최고일세>

 

이것은 뒤러가 베네치아에서 보낸 편지들 중의 하나이다. 이 글에서 그는 뉘른베르크 길드 조직의 엄격한 질서 속에 있는 미술가로서의 그의 입장과 이탈리아 동료 미술가들이 누리는 자유를 비교해보고 그 뚜렷한 대조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여기서 '나는 얼마나 태양을 그리워하며 떨겠는가? 여기서 나는 왕인데 고향에서는 한낱 식객에 지나지 않을 것이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뒤러의 그 후의 생애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사실 그도 다른 장인들 처럼 처음에는 뉘른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시민들과 흥정도 하고 시비도 해야 했다. 그는 그들에게 최고 품질의 물감을 사용할 것과 또 그것을 여러 겹으로 칠할 것을 약속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점점 퍼져나가게 되었으며 자신을 영광되게 하는 수단으로서 미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막시밀리앙 황제는 여러 야심적인 계획에 뒤러를 고용했다. 그의 나이 50에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그는 실로 제왕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 자신도 대단히 감동되어 안트웨르펜의 화가들이 그들의 조합 회관에서 큰 잔치를 베풀어 그를 어떻게 대접했는지들 묘사하면서 ' 내가 식탁으로 안내되었을 때 사람들은 마치 위대한 군주를 맞이하듯이 양 옆으로 모두 일어섰는데 그들 중에는 지체 높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모두들 가장 겸손한 태도로 머리를 숙였다'라고 쓰고  있다. 북유럽의 나라들에서도 위대한 미술가들은 마침내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멸시하던 속물 근성을 타파하게 된 것이다.

 

17세기의 한 저술가는 아샤펜부르크(Aschaffenburg)의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uunewald)라는 화가에 대해 그를 '독일의 코레조'라고 부르며 그의 작품들 중의 몇점을 대단히 칭찬했는데 그로부터 이 작품들과 동일한 화가가 그렸다고  확신되는 다른 작품들은 통상 그뤼네발트라는 라벨이 붙게 되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뒤러는 그의 습관, 신념, 취향과 표현의 매너리즘까지도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마치 살아있는 사람인양 우리들 앞에 서 있지만 그뤼네발트는 우리에게 셰익스피어만큼 신비스러운 존재이다.

통칭 '그뤼네발트',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1515년, 이젠하임 제단화의 부분, 목판에 유채, 269 X 307cm, 콜마르 운터린덴 박물관.

 

통칭 '그뤼네발트',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세부 ​

 

통칭 '그뤼네발트',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세부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몇점 안되는 그의 작품들은 크고 작은 지방의 교회에 있는 전통적인 형식의 제단화이며 그 중에는 알사스의 한 마을인 이젠하임(Isenheim)에 있는 대형 제단화(소위 이젠하임 제단)와 거기에 딸린 많은 날개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그가 뒤러처럼 단순한 장인과는 다른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했다거나, 또는 고딕 시대 말기에 이룩된 종교 예술의 고정된 전통으로 인해 그의 미술 활동이 제한받았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는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발견들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미술의 이념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한도 내에서만 그것들을 활용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는 회의라는 것을 느껴보지 못한 것 같다. 그에게 있어 미술은 아름다움위 숨겨진 법칙을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목적, 즉 중세의 모든 종교 미술의 목적인 그림으로 설교를 제공해주고 교회가 가르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젠하임 제단화의 중앙 패널은 이 절대적인 목적을 위해서 다른 모든 문제들을  희생시켰음을 보여준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구세주의 뻣뻣하고 참혹한 모습에는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생각하는 그런 아름다움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뤼네발트는 수난절의 설교자처럼 이 고통스러운 장면의 무서움을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ㄷ다. 예수의 죽어가는 신체는 십자가의 고문으로 뒤틀려 있으며, 천형의 가시들은 온 몸을 덮고 있는 곪어터진 상처를  찌르고 있다. 검붉은 피는 병적인 파리한 살빛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의 표정과 인상적인 손 모양으로 고뇌의 예수는 그가 못박힌 갈보리 언덕의 의미를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다.

 

예수의 고통은 전통적으로 십자가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반영되고  있는데 과부의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는 주님이 그녀를 돌보라고 부탁한 복음서 저자 성 요한의 팔에 안겨 기절해서 쓰러지고 있고 향유 단지를 가지고 있는 좀 작은 인물로 그려진 성 막달라 마리아는 슬픔을 못이긴 채 두 손을 꼭 맞잡고 있다. 십자가의 다른 쪽에는 구세주를 상징하는 양이 십자가를 메고 피를 성찬배 속에 쏟고 있으며 성 세례 요한이 건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는 준엄하고 당당한 몸짓으로 구세주를 가리키고 있으며 그의 머리 옆에는 그가 한 말이 써 있다. "그 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복음 3장 30절)." 

 

여기서 이 미술가는 제단을 바라보는 신도들이 이 말씀을 묵상할 수 있도록 세례 요한이 손을 들어 가리키게 하여 그 말씀을 강조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는 우리들이 예수가 흥하고 우리가 왜소해지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기'를 원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그림은 무섭고 소름끼치는 장면을 하나도 완화하지 않고 그대로 묘사한 것  같으면서도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특징을 한 가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물상의 크기가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 십자가 밑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손과 예수의 손을 비교해보기만 해도 그 크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그뤼네발트는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되어온 근대 미술의 법칙들을 거부하고 인물들의 중요성에 따라서 그 크기를 변화시켰던  중세와 원시 시대의 원칙들로 의도적으로 되돌아간 것이 분명하다. 제단의 영적인 의미를 위해서 미적 표현을 희생시켰듯이 그는 또한 정확한 비례에 관한 새로운 요구를 도외시해 버렸다. 그러나 이것이 그로 하여금 성 요한의 말씀에 담긴 신비로운 진리를 더 잘 표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뤼네발트의 작품은 이렇게 하여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예술가는 '진보적'이 아니더라도 위대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진정 예술의 위대성은 새로운 발견에 있지 않다. 그뤼네발트는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될 때에는 언제나 이 새로운 발견들을 채용해서 그가 이 새로운 기법들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예수의 고통받고 죽어가는 신체를 묘사하는 데 사용했던 붓을 이번에는 다른 그림에서 예수가 부활하여 하늘의 빛을 가진 초자연적인 형상으로 변용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사용했다.

 

이젠하임 재단화.

 

이젠하임 제단화.

 

'그뤼네발트', <그리스도의 부활>, 1515년, 이젠하임 제단화의 부분, 목판에 유채, 269 X 143cm, 콜마르 운터린덴 박물관.

 

이 그림은 너무나 많은 것이 색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가 휘황찬란한 빛을  남기고 무덤에서 막 솟아 나와 승천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의 신체를 감싸고 있는 수의는 후광의 여러 색의 광선을 반사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위로 날아 올라가는 부활한 예수와 이 갑작스러운 빛의 환영에 압도되어 땅 위에 쓰러져 있는 군인들의 무기력한 몹짓 사이에는 날카로운 대조가 있다. 전경과 배경 사이의 거리를 측정할 수는 없지만 무덤 뒤에 있는 군인은 고꾸라진 인형들처럼 보이며 그들의 일그러진 형상들은 예수의 변용된 신체의 조용하고 장엄하고 평온한 모습을 부각시키는 역할만을 할 뿐이다.

 

뒤러 세대에 세번째로 유명한 독일의 미술가인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 1472 - 1553)는 처음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화가였다. 그는 수년 동안을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청년 시절을 보냈다. 알프스 남쪽 산기슭 태생인 조르조네가 산악의 풍경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에(조르조네의 폭풍우) 이 젊은 화가는 해묵은 산림과 낭만적인 풍경을 가지고 있는 알프스의 북쪽 산기슭에 매혹되어 있었다. 뒤러가 그이 동판화를 세상에 내 놓았던 1504년에 크르나흐는 이집트로 도피하는 성 가족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 성가족은 숲이 우거진 산악 지대의 한 샘물 근처에서 쉬고 있다. 그곳은 덤불이 많은 나무들과 아래 쪽으로 아름다운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 좋은 들판이다.

루카스 크라나흐, <이집트로 피난 중의 휴식>, 1504년, 목판에 유채, 70.7 X 53cm, 베를린 국립박물관 회화관.

 

성모의 주위에는 작은 천사들의 무리가 모여 있는데 한 천사는 아기 예수에게 딸기를 주고 있고, 다른 천사는 조개 껍질에 물을 길어오고 있으며 나머지 천사들은 자리에 앉아서 플루트와 피리를 불며 피로에 지친 피난민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있다. 이 시적인 새로운 구상은 로흐너의 서정적인 미술 정신과(p. 272, <장미 그늘 아래의 성모>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크라나흐는 만년에 이르러 멋쟁이 유행을 쫓는 작센의 궁정 화가가 되었는데 주로 마티 루터와의 친분에 힘입어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라 도아누 지방에 잠깐 머물러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프스 지역의 주민들에게 그들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눈을 뜨게 할 수 있었다.

 

레겐스부르크의 화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 1480 - 1538)는 숲과 산속을 누비고 다니며 풍우에 시달린 나무와  바위의 형태를 연구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수채화와 동판화, 그리고유화 몇점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았으며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변화이다. 자연을 그렇게 사랑했던 그리스 인들조차도 목가적인 장면을 위한 배경으로서만 풍경을 그렸다.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풍경>, 1526-8년경, 목판에 붙인 양피지에 유채, 30 X 22cm, 뮌헨 알테 피나코텍.

 

중세에는 종교적인 테마이든 세속적인 테마이든 분명한 이야깃거리를 다루지 않는 그림은 거의 상상할 수가 없었다.화가의 묘사력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화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즐겁게 묘사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는 그림을 팔 수가 있었다.

 

위대한 시기였던 16세기 초엽의 네덜란드에서는 15세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던 얀 반 에이크,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 후고 바 데르 후스 등과 같은 뛰어난 거장들을 배출하지는 못했다. 독일의 뒤러처럼 적어도 새로운 지식을 배우려고 노력했던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옛날 장식에 대한 집착과 새로운 것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아래 그림은 화가 얀 호사르트(Jan Gossaert), 흔히 마뷰즈(Mabuse : 1478 - 1532)라고 불리우는 작가의 작품으로서 그러한 갈등을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이다. 전설에 의하면 복음서를 쓴 성 루가는 직업이 화가였다고 한다.여기에 성 루가는 성모와 아기 예수의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뷰즈가 인물들을 그린 방식은 얀 반 에이크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전통과 흡사하다.

 

통칭 '마뷰즈', <성모를 그리고 있는 성 루가>, 1515년경, 목판에 유채, 230 X 205cm, 프라하 국립미술관 .

 

그러나 그 배경을 그린 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는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업적에 관한 그의 지식과 과학적인 원근법에 대한 능숙한 솜씨, 그리고 고전기의 건축에 대한  조예와 능숙한 명암처리 방법 등을 과시하려 한 것 같이 보인다. 그 결과 이 그림은 확실히 대단한 매력을 가지게 되었으나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모델들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조화미는 결여되어 있다.  왜 하필이면 성 루가가 성모상을 그리는데 겉보기는 호화롭지만 외풍이 있을 듯한 텅 빈 궁전의 중정에 자리잡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의 미술가는 새로운 양식을 따르는 미술가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독일의 그뤼네 발트와 같이 남유럽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물결에 휩쓸리기를 거부한 미술가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스헤르 토헨보스라는 네덜란드의 도시에는 히에로니무습 보스(Hieronymus Bosch)라고 불리우는 화가가 살고 있었다. 이 화가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1516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몇살이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미 1488년에 기성 화가로 상당 기간 활동을 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뤼네발트와 마찬가지로 보스는 현실을 가장 신빙성 있게 표현하기 위해서 발전되어온 회화의 전통과 새로운 수법들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그럴 듯하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보스는 지옥의 광경을 소름끼치게 묘사한 화가로 유명하다. 16세기 말 스페인의 음울한 왕 페리페 2세가 인간의 간악함에 대하여 그처럼 많은 관심을 보였더 이 미술가를 특별히 좋아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아래 그림은 펠리페 2세가 사들인 후 아직까지도 스페인에 남아 있는 보스의 몇몇 세폭화(triptych) 중 하나의 양 날개 그림을 보여준다. 왼쪽에서 우리는 악이 세상을 침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천국과 지옥>, 1510년경, 세폭화의 양날개 패널화, 목판에 유채, 135 X 45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이브의 창조에 뒤이어 아담을 유혹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두 사람은 낙원에서 쫓겨난다. 하늘에서는 하느님에게 반란을 일으킨 천사들이 떼를 지어 역겨운 곤충의 모습으로 내던져지고 있다.  우리는 다른 날개 그림에서 지옥의 모습을 본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름끼치는 공포와 화염과 고문을 보게 되는데, 반신은 짐승이고 반신은 인간이나 또는 기계로 되어있는 무시무시한 악마들이 온갖 수법을 동원해 죄 많은 영혼들을 영원히 괴롭히고 벌을 주고 있다. 중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괴롭히던 공포심을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형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미술가는 역사상 보스 한 사람 뿐일 것이다. 이러한 업적은 아마도 새로운 시대 정신이 미술가들에게 그들이 본 것을 재현하는 방법을 마련해주었고 반면에 구시대의 이념이 의연히 살아남아 있었던 바로 그 순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스도 그가 그린 지옥도의 한 부분에 얀 반 에이크가 아르놀피니의 평화로운 약혼식 장면에 써넣었던 것과 같은 말을 써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내가 거기 있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