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바로크 운동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신교 국가들은 한껏 위세를 떨치던 이 바로크 유행에 무관심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제로 채용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가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 청교도적인 취향과 세계관을 싫어했던 왕정복고 시기에도 그랬다. 이 시기에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건축가는 크리스토퍼 렌 경(Sir Christopher Wren)이었는데 영국은 1666년의 대화재를 입은 런던의 교회당들을 재건하는 임무를 그에게 맡겼다. 그가 지은 세인트 폴 대성당은 불과 20여 년 전에 로마의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교회와 비교해보면 매우 흥미롭다. 렌은 로마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바로크 건축가들의 건물 배치 방법과 장식적인 효과에 큰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렌의 성당은 보로미니의 교회당보다 규모가 훨씬 커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중앙의 둥근 지붕와 양쪽의 탑들과 고대 신전의 정면을 연상시키는 정면 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로미니의 바로크 식 탑과 렌의 탑 사이에는 확실히 유사성이 있으며 특히 2층의 경우가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정면 현관들이 주는 전반적인 인상은 대단히 다르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곡선적인 곳이 없어서 운동감을 암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강인함과 안정감을 준다. 건물에 당당함과 고귀함을 주기 위해서 사용된 쌍으로 나란히 선 원주들은 로마의 바로크 양식보다는 오히려 베르사유 궁전의 정면을 연상시킨다. 세부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는 렌의 양식을 바로크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의 장식에는 괴상한 것이나 환상적인 면이 하나도 없다. 그의 모든 형태들은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의 모델들을 엄격하게 따르고 있다. 건물의 각 형태와 부분은 그것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하지 않은 그 자체로 보여질 수도 있다. 보로마니가 멜크 수도원을 지은 건축가의 자유분방함에 비하면 렌은 우리들에게 은근하고 침착한 인상을 주고 있다.
신교와 가톨릭의 교회 건축의 대조는 렌이 설계한 교회, 예를 들면 런던의 세인트 스티븐 월브룩 교회와 같은 건물의 내부를 살펴보면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아래의 그림이 보여주는 교회당의 내부 모습은 주로 신자들이 예배를 위해서 만나는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그 목적은 이 세상이 아닌 천국의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도들의 생각들을 집중시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설계한 많은 교회에서 렌은 엄숙하고 동시에 간소한 느낌을 주는 이러한 공간의 테마에 언제나 새로운 변화를 주고자 노력했다. 교회들이 그랬듯이 성(城)들도 동일한 경향을 따랐다. 영국의 어떠한 왕도 베르사유와 같은 궁전을 짓는 데 필요한 엄청난 자금을 모을 수가 없었고 영국의 귀족들 또한 사치와 방종의 면에서 독일의 제후들과 경쟁하려 하지 않았다. 건축의 열기가 영국에 도달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예외적인 경우였으며 18세기 영국의 이상(理想)은 성이 아니라 교외의 저택이었다.
교외의 저택들을 설계한 건축가들은 보통 바로크 양식의 지나친 호사스러움을 배격했다. 그들의 야심은 그들이 '고상한 취향'이라고 생각한 규칙을 하나도 위반하지 않으면서 고전 건축의 실제적인 또는 그렇다고 주장하는 법칙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따르려는 것이었다.고전 시대 건축들의 유적을 과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측량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건축가들은 그들과 장인들에게 표본을 제공해주기 위해서 그들의 연구 조사 결과를 교과서로 출판했다. 이 교과서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가 저술한 것인데 이 책은 18세기 영국에서 건축에 관한 모든 취향을 규정하는 최고의 권위서로 간주되었다. 자기의 별장을 '팔라디오 식'으로 짓는 것이 유행의 첨단으로 여겨졌다. 아래 그림은 그러한 팔라디오 식 별장인 치직(Chiswick) 저택이다. 취향과 유행의 위대한 선도자인 벌링턴(Burlington : 1695 - 1748) 경이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서 직접 설계하고 그의 친구인 윌리엄 켄트(William Kent : 1685 - 1748)가 장식한 이 건물은 정말로 팔라디오의 로톤다 별장과 대단히 유사하다.
힐데브란트나 가톨릭 유럽의 다른 건축가과 달리 영국의 저택을 설계한 건축가들은 어디에서나 고전 건축의 엄격한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당당한 현관은 코린트 식 기둥 양식을 가진 고대 신전의 정면과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건물의 벽은단순하고 평범하여 곡선이나 나선형이 없고 지붕 위를 장식하는 조각상도 없으며 그로테스크한 장식도 없다. 그 이유는 벌링턴 경과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 1688 - 1744 , 18세기 초 영문학의 대표적인 고전주의 경향의 시인, 비평가) 시대의 영국에서는 취향의 척도가 또한 이성적인 척도였기 때문이다. 영국의 전반적인 기질은 바로크 식 장식에 나타난 공상의 비약에 반대했고 또 감정을 압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예술에도 반대했다. 베르사유 궁의 정원 양식같이 끝없이 이어지는 잘 다듬어진 생울타리와 작은 길까지 건축가의 설계에 포함되어 실제 건물 이외의 주변 지역까지 확장된 형식적인 느낌을 주는 정원은 불합리하고 인공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정원이나 공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반영해야 하며 화가의 눈을 매혹시키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모아 놓아야 하는 것이었다. 켄트 같은사람은 팔라디오 식 별장의 이상적인 주변 경관으로서 영국의 '풍경 정원(landscape garden)'을 고안해냈다. 그들은 건축에 있어서의 이성과 취향의 척도를 한 이탈리아 건축가의 권위에서 찾았듯이 경치에 있어서의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서도 남유럽의 한 화가에게 의존했다. 자연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지에 관한 그들의 생각은 대체로 끌로드 로랭의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18세기 중엽에 조성된 윌트셔(Wiltshire) 주 스타우어헤드(Stourhead)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로랭과 팔라디오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아래 그림에서 배경에 있는 '신전'은 팔라디오의 로톤다 별장을 연상시키는 한편 연못과 다리 로마의 건물을 연상케 하는 전체적인 경관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영국 풍경의 아름다움이 끌로드 로랭의 회화에서 영향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취향과 이성의 척도에 의거한 영국의 화가나 조각가들의 입장이 반드시 부러울만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신교의 승리와 성상이나 사치에 대한 청교도들의 적대 의식이 영국의 미술 전통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회화에서 유일하게 수요가 여전한 영역은 초상화 부문이었는데, 이러한 기능마저도 주로 홀바인이나 반 다이크 같은 외국 화가들이 충족시켰다. 이들은 외국에서 명성을 얻은 뒤에 영국으로 초청된 화가들이었다. 벌링턴 시대의 상류 사회 신사들은 청교도적인 이유를 내세워 그림이나 조각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외부의 세계에서 아직 명성을 얻지 못한 본국의 미술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저택에 걸 그림을 원할 경우 그들은 차라리 이탈리아 화가의 이름이 들어 있는 그런 그림을 사려했던 것이다. 그들은 당대의 화가들을 외면한 채, 스스로를 미술품 감식가로 자처했으며 또 그들 중 일부는 옛 거장들의 훌륭한 걸작품들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책의 삽화를 그려서 생계를 유지해야했던 영국의 한 젊은 판화가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업 호가스(William Hogarth : 1697 - 1764)였다. 그는 해외에서 수백 파운드를 들여서 사오는 그림들을 그린 화가들처럼자신도 화가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영국에는 그 시대의 새로운 미술을 이해해주는 대중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끌 새로운 양식의 그림을 창조해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사람들이 '그림의 효용이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닫고 청교도적인 전통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예술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에게 착한 일의 보상과 악한 일의 대가를 가르칠 많은 교훈적인 내용을 그릴 것을 계획했다. 그는 방탕과 나태로부터 범죄와 죽음에 이르는 <탕아의 편력(A Rake's Progress)>이나 소년이 고양이를 놀리는 일에서부터 어른들의 잔인한 살인에 까지 이르는 <잔혹의 네 단계(Four Stages of Cruelty)>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가 이러한 교화적(敎化的)인 이야기와 경고의 사례들을 어찌나 잘 그렸던지 이 일련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모두다 그 그림이 의미하는 모든 사건들과 교훈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상 그의 그림은 일종의 무언극(無言劇)처럼 모든 등장 인물들은 각각 주어진 임무에 맞는 제스처나 무대의 소도구를 사용해서 그들의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한다.
호가스 자신도 이 새로운 유형의 그림을 극작가나 연출가의 수법에 비교했다. 그는 각 인물의 '성격'을 얼굴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옷차림이나 행동을 통해서도 표현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의 연속 그림들은 하나의 이야기나 아니면 오히려 하나의 설교처럼 읽혀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런 유형의 그림들은 호가스가 생각했던 것처험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중세 미술이 교훈을 가르치기 위하여 형상을 사용했으며 또 그림을 통해 설교를 하는 이러한 전통은 호가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미 대중 미술 속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술 주정뱅이의 운명과 도박의 위험을 보여주는 조잡한 판화들이 시장에서 팔렸으며 또 엉터리 시인들도 그 비슷한 이야기들을 담은 소책자를 팔기도 앴다.
그러나 호가스는 이런 점에서 볼 때 대중 미술가는 아니었다. 그는 과거의 대가들과 그들이 회화적인 효과를 내는 데 사용한 방법을 세심하게 연구했다. 그는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익살스런 에피소드로 그림을 채우고 또 인간의 유형을 개성적으로 표현하는데 탁월했던 얀스텐과 같은 네덜란드의 대가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 당시의 이탈리아 화가들과 구아르디 풍의 베네치아 화가들의 수법도 알고 있었다. 구아르디로부터 그는 붓을 두세 번 힘차게 휘두름으로써 한 인물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기법을 배울 수 있었다.
아래의 그림은<탕아의 편력>에 나오는 한 장면으로 빈털터리가 된 탕아가 베들럼 정신 병원에서 광란하는 미치광이로 인생을 끝맺는다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갖가지 종류의 미치광이들이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장면이다. 이 그림의 첫 번째 독방에 있는 종교적인 미치광이는 바로크 식 그림에 나오는 성인들처럼 짚으로 만든 침상위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두 번째 독방에는 왕관을 쓰고 있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보인다. 그 밖에도 정신 병원의 벽에 세상사의 모습을 휘갈겨 그리고 있는 백치와 종이로 만든 망원경을 가지고 있는 장님, 계단에 몰려 있는 기괴한 3인조-빙그레 웃으며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과 바보 같은 가수와 가만히 앉아서 앞만 멍하게 응시하는 감정을 상실한 사람의 애처로운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때 궁지에 빠져 있게 내버려두었던 하녀 이외에는 슬퍼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죽어가는 탕아 등이 있다. 탕아가 쓰러지자 사람들은 잔인하게 그를 구속했던 족쇄를 벗겨준다.
그것이 이제는 필요없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비극적인 장면이다. 이것은 이 탕아를 비웃는 그로테스크하게 생긴 난장이와 화려했던 과거에 그를 알던 우아한 두 여자 방문객들과의 대조에 의해 더 비극적으로 되고 있다. 이 그림에 나오는 각 인물들과 에피소드는 모두 호가스가 말하는 이야기와 꼭 들어맞지만 그것만으로 이 그림을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호가스의 그림에서 그가 주제 집착하고 있으면서도 붓을 사용하고 빛과 색을 배합하는 수법 뿐만 아니라 인물들을 배치하는 데에도 대단한 솜씨를 발휘한 것을 보면 그는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화가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탕아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도 불고하고 고전주의 전통을 가진 이탈리아 그림만큼 신중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서야 비로소 18세기 영국의 상류 사회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림을 그린 영국의 화가 죠슈아 레이놀즈 경(Sir Joshua Reynolds : 1723 - 1792)이 탄생했다. 호가스와는 달리 레이놀즈는 이탈리아 여행을 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거장들인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코레조, 티치아니 등이 필적할 수 없는 진정한 미술의 모범이라는 점에서 그 당시의 감식가들과 의견을 같이 했다. 그는 미술가들의 유일한 희망은 과거 거장들의 장점이라고 불리우는 것들, 이를테면 라파엘로의 소묘, 티치아노의 채색 등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모방하는 것이라는 카라치의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레이놀즈는 나중에 영국에서 화가로서 성공해서 그 당시 새로 창설된 영국 왕립 미술원(Royal Academy of Arts)의 초대 원자이 되었을 때 일련의 강연을 통해소 지금 읽어도 재미있는 이러한 '아카데믹한' 이론들을 상술했다.
이 강연에 의하면 레이놀즈는 그의 동시대인들처럼(예를 들어 존슨 박사) 취향에는 그것을 재는 척도가 있으며 예술에서 과거의 권위있는 모범의 중요성을 믿고 있었다. 그는 학생들이 이탈리아 회화의 걸작들을 연구할 편의를 제공받는다면 미술에 있어서의 올바른 제작 절차를 상당히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강연들은 고상하고 품위있는 주제의 탐구를 권하는 말로 가득 차있다. 왜냐하면 레이놀즈는 거창하고 감동적인 것만이 '위대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화가라면 대상을 세밀하고 예쁘게 묘사해서 인류를 즐겁게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그의 신념의 위대함으로 사람들을 개선하는 데 이바지 해야 한다." 이것은 레이놀즈가 제 3회 '강연'에서 한 말이다.
이런 인용문을 보면 레이놀즈가 상닫히 거만하고 진부한 사람처럼 생각되기 쉬우나 그의 강연들을 엮어 놓은 <강연집(講演集)을 읽어보고 그의 작품을 감상해보면 이러한 선입견은 곧 사라지게 된다. 사실 그는17세기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들들의 저서에서 발견돼는 미술에 관한 견해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앴다. 비평가들은 '역사화'라는 것의 품위에 많은 강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우리는 단지 손을 가지고 작업한다는 이유로 화가나 조각가를 멸시하게 만든 사회적 편견과 속물 근성에 대항해서 예술가들이 얼마나 힘겨웉 투쟁을 치러왔는지를 살펴보았다. 또한 미술가들이 그들의 실제 작업을 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한다는 것과 그들이 시인이나 학자 못지 않게 상류사회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해온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미술가들이 미술에 있어서 시적인 착상이 중요하며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의 고상함을 강조하게 된 것도 이처럼 토론을 통해서 였다. 그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 초상화나 풍경화의 경우처럼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손으로 모사하는 작업은 어딘가 비천한 감이 없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회화란 단지 단순한 손재주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즉 레니의 <오로라(새벽의 여신)> 이나 푸쌩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와 같은 주제를 그리는 데에는 해박한 학식과 상상력이 필요하다"라로 주장했다. 레이놀즈는 지식인 이었고 지식인이었고 존슨 박사(Samuel Johnson : 1709 - 1784 : 18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비평가)와 그 그룹의 친구였으며, 또 권력있고 돈 많은 사람들의 우아한 교외의 별장이나 도시의 저택에서 그들과 동등하게 환영받았다.
아래 그림은 존슨 박사 그룹의 한 지식인이며 이탈리아 출신의 학자로서 영어-이탈리아 어 사전을 편찬하고 후에 레이놀즈의 <강연집>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조지프 바레티의 초상이다. 이 그림은 친숙하면서도 예의를 잃지않은 하나의 완벽한 기록이며 게다가 매우 훌륭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어린이의 초상화를 그려야 할 때도 레이놀즈는 배경을 신중하게 선택함으로써 그 그림을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아래 그림은 그가 그린<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의 초상화이다. 우리는 벨라스케스도 또한 강아지와 함께 있는 어린이의 초상화를 그렸음을 기억한다. 그러나 벨라스케스가 자신이 눈으로 본 질감과 색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레이놀즈는 우리에게 소녀가 애완용 강아지에 기울이고 있는 애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레이놀즈는 그 초상화를 그리기 전에 소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레이놀즈는 보울즈 양의 집에 초청을 받아서 저녁 식사 때 보울즈 양 옆에 앉았다. "레이놀즈는 그녀가 그를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게끔 옛날 이야기나 요술을 부려서 그녀를 대단히 즐겁게 해주었다.
그는 그녀가 식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물건을 보도록 하고는 그 사이에 그녀의 접시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접시를 찾는 척 하다가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접시가 다시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다음날 그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레이놀즈를 따라서 그의 집으로 가 희열이 충만한 표정을 짓고 앉았다. 바로 그 표정을 그는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화폭에 담았다." 그 결과는 벨라스케스의 직설적인 배치보다 더 자의적이고 의도적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는 레이놀즈가 물감을 사용하는 방식이나 살아있는 피부나 푸실푸실한 개의 털을 처리하는 방법을 벨라스케스의 것과 비교해보고는 레이놀즈의 작품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이놀즈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효과를 거기에서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그는 이 귀여운 아이의 성격을 표현하고 그 성격의 우아함과 매력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 주려고 하였다.
레이놀즈가 그린 보울즈 양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런던의 윌리스 컬렉션(Wallace Collection)에는 초상화에서는 그의 호적수였으며 그보다 불과 네 살 아래였던 토머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 1727 - 1788)가 그린 비슷한 또래의 소녀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것은 <하버필드 양의 초상>으로 게인즈버러는 작은 숙녀가 망토의 끈을 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아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의 행동에는 감동적이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산책을 가기 위해 막 옷을 입고 있는 중인것 같다. 그러나 애완용 강아지를 안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레이놀즈의 창안처럼 게인즈버러는 그 단순한 행동을 매우 온화하고 예쁘게 만들었다. 게인즈버러는 레이놀즈에 비해 '창안'에 훨씬 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서포크 주의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그림에 타고난 재능을 가졌으며 이탈리아에 가서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할 필요는 한 번도 느끼지 않았다. 그 그림에서 어린이의 홍조 띤 얼굴색이나 망또의 번쩍이는 천을 묘사하는 방법, 모자의 가장자리 장식과 리본을 처리한 방법 등은 모두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체의 특성과 외양을 묘사해내는 그의 완벽한 솜씨를 보여준다.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 모두 쇄도하는 초상화 주문으로 인해 그들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는 것은 불행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레이놀즈가 고대사에 나오는 야심적인 신화의 장면이나 일화들을 그릴 시간과 여유를 갈망한 반면에 게인즈버러는 그의 경쟁자가 경멸했던 바로 그런 주제, 즉 풍경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그는 도시인힌 레이놀즈와는 달리 조용한 시골을 좋아했고 그가 진실로 즐긴 여흥은 실내악을 듣는 일이었다.
불행하게도 게인즈버러는 그의 풍경화를 사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풍경화는 그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린 습작들은 자연을 직접 묘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그림들은 어떤 기분을 불러일으키고 반영시키기 위한 풍경 '구성 작품'들이었다.
불행하게도 게인즈버러는 그의 풍경화를 사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풍경화는 그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린 습작으로 남아있다. 위의 그림은 영국 시골의 나무들과 언덕들을 아름다운 풍경이 되도록 짜맞추어서 그 당시가 풍경 정원이 유행하던 시대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왜냐하면 게인즈버러의 습작들은 자연을 직접 묘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영국의 제도와 영국인들의 취향은 이성의 법칙을 갈망했던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찬미하는 모델이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미술이 신처럼 군림한 통치자들의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이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가스에게 만족했던 대중이나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에게 초상화를 그려받기 위해서 포즈를 취했던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도 역시 베르사유 궁전의 중후하고 장엄한 바로크 양식이 18세기 초에 오면 와또의 로코코 미술 작품과 같은 보다 섬세하고 친근한 감각효과에 밀려 유행에서 벗어났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귀족풍의 몽상적인 세계는 퇴조하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당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 제일 위대한 화가는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 Simeon Chardin : 1699 - 1779)으로 그는 호가스 보다 두 살 아래인 화가였다. 아래 그림은 그의 매력적인 그림 중의 하나로서 한 여인이 식탁 위에 저녁을 차리면서 두 아이들에게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말하는 소박한 장면을 보여준다.
샤르댕은 이러한 서민 생활의 평온한 광경을 좋아했다.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詩情)을 느껴 화폭에 담는 면에서 그른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와 유사하다. 그의 색채는 고요하고 은근하다. 그리고 와또의 번쩍이는 그림과 비교할 때 그의 작품은 광채를 잃은 것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원작을 잘 살표보면 우리는 거기에서 신중하게 구사된 색조의 미묘한 농담의 변화와 꾸밈 없어 보이는 화면 구성의 솜씨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점이 그를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18세기의 화가의 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영국에서처럼 프랑스에서도 권력의 겉치레보다는 서민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초상 미술에 도움을 주었다. 아마도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 미술가로는 화가가 아니고 조각가인 장 앙뚜완느 우동(Jean-Antoine Houdon : 1741 - 1828)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훌륭한 흉상들은 백여 년 전에 베르니니가 시작했던 <콘스탄자 부오나렐리 상>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아래의 조각은 우동이 제작한 흉상 <볼테르 상>인데, 우리는 이 위대한 이성의 옹호자의 얼굴에서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 있는 지성과 또한 위인의 깊은 동정심을 '읽을 수' 있다.
영국에서 게인즈버러의 스케치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자연의 '그림같이 아름다운(picturesque) 측면에 대한 취향은 마침내 18세기 프랑스에서도 나타나게 되었다. 아래 그림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 : 1732-1806)의 소묘인데 그는 게인즈버러의 세대에 속했던 사람이었다. 그 또한 상류 사회의 테마을 그리는 와또의 전토을 빠르는 매력적인 화가였다. 그의 풍경화 소묘 작품들에서는 놀라운 효과를 구사하는 그의 능수능란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로마 근교 티볼리에 있는 애스테 별장에서 바라 본 이 장면은 그가 실제 풍경의 단면에서 어떻게 장엄함과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