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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미술

서양 미술 이야기 이교수 2023. 11. 3. 12:13

로마네스크 미술(Romanesque art)은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기원후 약 1,000년부터 고딕 양식이 13세기 이후에 나타날 때까지의 서유럽의 미술을 가리킨다.

개요

10세기부터 12세기(지역에 따라서는 13세기 전반까지)경까지를 로마네스크 시대라 부르며, 11세기에서 12세기 초에 걸쳐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로마네스크란 원래 건축사상의 용어였다. 두꺼운 석조의 벽체(壁體), 아치, 돔을 가진 건축에 끼친 고대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로마네스크(로마풍)라는 호칭을 붙였으나, 그 후 개념의 변화가 생겨 고대 로마의 전통을 가미하고 에스파냐를 거쳐 전해진 사라센 양식(樣式)이나, 활발해진 수도원 상호간의 교류, 십자군, 성지 순례 등을 통하여 전래된 동방 여러 지역의 양식 또는 카롤링거 양식, 비잔틴 양식 등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겨난 중세 중기의 양식을 가리키게 되었다.

특징

광대한 프랑크제국이 분열되고, 노르만인, 사라센인 등의 거듭되는 침입으로 서유럽에 혼란과 공백(空白)이 계속되는 사이에 각지의 봉건제후(封建諸侯)는 세력을 넓혔고, 중앙집권제는 붕괴되었다. 미술활동도 궁정 중심의 전유럽적인 것을 상실하고, 각지에서 부흥한 수도원을 단위로 해서 창조되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따라서 저마다 지방양식이 로마네스크 미술의 특징의 하나가 되게 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지방양식에도 불구하고 일괄된 공통성을 부여해 주고 있는 것은 서유럽에 착실하게 뿌리를 박아가는 가독교 신앙이다. 권위의 상징이었던 종교미술은 수도사의 손으로 구현되어 점차 그림을 통한 교의 해설, 즉 '그림으로 보는 성서'로서의 성격을 나타내게 된다. 그것은 신앙의 대중화(大衆化)로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지의 작은 마을에서는 성상(聖像)으로 꾸미고 가꾼 교회가 세워졌다.

 

로마네스크 건축

12세기에 지어진 벨기에 투르네 성당의 남쪽 트랜셉트

프랑스 앙굴렘 성당

로마네스크 건축(Romanesque architecture)은 9세기 후반에 일어나 12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발전한, 반원 아치를 특징으로 한 중세 유럽의 건축 양식이다. 잉글랜드의 로마네스크 건축은 노르만 건축이라고도 불린다. 로마네스크 건축은 그 당시의 잦은 전쟁으로 인한 석재구조를 사용함으로 육중한 특질, 두꺼운 벽, 둥근 아치, 튼튼한 기둥, 그로인 볼트, 큰 탑과 장식적인 아케이드(늘어선 기둥 아래의 공간)로 잘 알려져 있다. 모든 건물은 명확히 정의된 형태를 가지고 상당수가 규칙적이고 대칭적인 평면을 가진다. 그래서 전체적인 외관은 그 뒤를 잇는 고딕 건축에 비교하면 단조로워 보인다. 이 양식은 지역적 특징과 다른 재료들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역에 잘 알려져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투르네 성당 내부 모습, 벨기에

 

고딕양식은 중세의 대표적인 양식이라서 종교적인 성향이 강한데 로마네스크는 그런 경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양식이라서 인간과 이성, 자연의 고대를 지나 신비의 세계, 신앙의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특색을 가진다. 이 시기에는 많은 성들이 지어졌지만, 이 시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숫자가 아직도 남아있는, 미완성인 것도 더러 있고 현재도 흔히 쓰이는 거대한 수도원 교회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 뮈르바크의 베네딕투스 교단 수도원 유적, 1160년 경, 알사스

 

 

개요

중세 도시 속의 교회 : 투르네 대성당, 1171~1213, 벨기에

 

카롤링거 왕조 밑에서는 아헨 성당과 같은 예를 제외한다면 건물의 지붕은 박공 형태의 목조였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은 주요 부분(네이브와 제실)에 석조의 아치 구조를 쓰고 있는 점에서, 종래에 없던 진보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이것은 네이브의 양쪽 벽체(壁體) 위에, 부채꼴의 석재를 석회칠로 쌓아올려서 반원형의 통 모양으로 쌓아올린 것이다. 이 통 모양의 아치는 천장을 높게 하고 내부 공간을 확대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무거운 돌지붕을 떠받치기 위해서 벽체는 두껍고, 곳곳에 바깥쪽으로의 버트리스를 필요로 하였다. 벽체로부터 직각으로 나와 있는 버트리스는 건물의 겉모양에 아름다운 실루엣을 던져주고 있다. 하중(荷重)에 대하여 벽의 강도(強度)를 유지하기 위하여 커다란 창을 만들기는 어려웠고, 따라서 내부 공간은 채광 부족을 면치 못하였다. 이러한 어둠도 당대의 종교적인 통일감을 이루는 데는 유효하였다. 안팎이 모두 묵직하고 장식이 적은 것이 특색이다.

 

이 경향은 12세기 이전의 북이탈리아 남프랑스, 카탈로니아 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카롤링거왕조의 전통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고, 탑·세례당(洗禮堂) 등을 종합한 설계의 대형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인츠, 아우크스부르크 등의 본사원과 마리아 라하 수도원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로마네스크 건축은 12세기에 들어와 부르고뉴 지방에서 그 정수를 찾을 수 있다. 오턴, 베즐레의 두 사원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채광량을 늘리고 내부 공간을 확대하기 위해, 네이브를 높게 하고 아일(側廊)도 아치로 하였다. 여기에서 고안된 교차아치는 후일 고딕건축을 출현시킨 모체가 되었다. 내부는 네이브 측벽을 복층(複層)으로 하고, 그 상부에 높은 창을 가진 형식이 채택되고 있다. 기둥은 굵은 문설주에 주두(住頭)를 붙여 아케이드를 떠받치게 한다. 기둥의 형식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장식주(裝飾柱)가 부가되거나 홈이 파진다. 외관도, 파사드에 장식조각이 새겨지고, 또는 북방에서 발달해 온 탑(塔)이 부착되기도 하여 신의 집 입구에 어울리게 모양을 갖추었다.

정의

트리어 대성당과 성모 마리아 성당,

 

 

"로마네스크"는 많은 건물들의 실제 연도가 잘 확인되지 않은 5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서유럽 건축을 설명하기 위해 고고학자인 샤를 뒤에리시에 드 제르빌이 19세기 초에 창안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현재 10세기 후반에서 12세기까지의 한정된 시기를 설명하는 데에 사용된다. 이 단어는 아직 로마식 둥근 아치를 갖는 중세 고딕 이전의 양식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이 양식은 비록 단순해지고 기술적으로 불충분하지만 로마식 건축물의 전통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 로마네스크" 라는 단어는 독일의 카롤링거 왕조와오토 왕조 시대를 표현하는 데에 사용된다. 반면 "로마네스크"라는 단어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프랑스 일부에서 클뤼니 수도원의 영향을 받기 전의 로마네스크의 특징을 갖는 건축을 말한다.

 

슈 파이어 대성당의 로마네스크 복고적 입면,  건축가  Heinrich Hubsch, 1854~1858, 독일

 

 

피사의 종탑, 건축가 : 보나노 피사노,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가 보나노 피사노, 건축 1173~1372, 높이 55.86m

 

 

                                               

피사의 대성당, 피사,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조각

로마네스크의 조각은 교회 건축의 일부를 이루는 주두(柱頭)나 팀펀(입구 상부의 아치를 막는 반원형의 석판), 또는 입구의 옆쪽과 제실의 외벽(外壁) 등의 공간을 메우고 있는 조각 가운데 가장 잘 대표되어 있다. 순수하게 추상적 요소에 의해 지배되는 일이 많은 건축 자체는, 라인 연안을 주로 하는 북부 지방에서도 독자적인 발전을 찾아볼 수 있었으나, 구체적인 형체를 추구하는 조각에서는 3차원적 시각에 익숙하던 고전적 조형의 전통을 가진 남부 지방인 프랑스나 에스파냐가 전개의 중심지가 되었다.

 

네 복음서 저자들의 상징인 사자, 천사, 독수리, 황소에 둘러싸여 있는 <영광의 예수>. 하단에는 12사도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네 복음서의 저자들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조각상

 

 

특히 11세기 중엽 이후의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에 속하는 일파의 활동 영향은, 중세조각의 양식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오턴, 베를레, 소류 등 클뤼니 파(派)의 사원은 오늘날 로마네스크 조각의 보고가 되어 있다. 신의 모습을 공공연히 표현하는 것은 종래의 기독교 미술 중에는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문맹의 농민에 대한 포교 장소가 되어 있던 교회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한 신이나 성서의 이야기가 도처에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 로마의 신(神)들이 자연주의적인 의인상(擬人像)으로 표현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고전부흥이었다. 여기에도 동방적인 괴수나 괴인이 나온다. 구약 성서나 묵시록이 주제가 되는 것은 이즈음부터이며, 그런 주제는 계율이나 교의를 도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장식조각은 어디까지나 건축의 일부로서, 건축의 기능에 의해 정해진 형체, 즉 일정한 형식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두(柱頭)는 도립(倒立)된 각추대(角錐臺)이며, 팀펀은 반월형이다. 주제는 이 정해진 모양 내에서만 전개되었다. 이 때문에, 비사실적(非寫實的)인 형상의 왜곡된 표현도 행하여졌다. 그러나 무명(無名)의 조각가는 결코 그것을 부자연한 모양으로는 만들지 않았다. 오턴 본사원의 입구 상부에 있는 길다란 마구릿돌(楯石)에 조각된 <이브>는 일견 엎드려 사과를 따고 있다. 동일한 주두(柱頭)의 <마지의 각성>은, 세 사람의 마지의 부감도(府瞰圖)와 헤롯의 음모를 고하는, 측면시(側面視)된 천사가 교묘한 구성에 의해 대형(臺形) 속에 정리되어 있다.

 

베즐레의 팀펀에서는, 신의 모습은, 겨우 비현실적으로 다리를 구부리게 함으로써 반월형 속에 들어가 있다. 이 커다란 신의 모습은 신의 위대함을 표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정면성(正面性)의 법칙(法則)도 그 특색이다. 로마네스크의 조각상에서는 신·그리스도·성모 등 신앙의 주대상(主對象)은 반드시 정면을 향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상(像)들은 대부분 반부조(半浮彫) 또는 고부조(高浮彫) 수법으로 제작되고, 옥내(屋內)의 것은 대부분 채색되어 있다.

 

 

클뤼니 수도원, 프랑스

 

클뤼니 수도원의 역사

클뤼니 수도원은 아키텐 공작 기욤 1세에 의해 910년에 지어졌다. 그는 베르노 수도원장을 교황 세르지오 3세의 인허 하에 클뤼니 수도원의 첫 수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수도원에서는 베네딕도 규칙서를 철저히 지켰고, 서양의 군주들이 수도원 생활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11세기 베네딕트 회의 설립은 유럽사회의 핵심이었다. 한편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증 ·개축을 거듭하면서 수도원의 규모가 커졌는데,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위그노 및 프랑스혁명을 거치며 거의 파괴되고 말았다. 현재는 몇몇 부분만 남아있게 되었다. 이 수도원이 유명한 것은'클뤼니 개혁'으로 불리는 수도원 개혁운동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설립

910년 오베르뉴의 영주이자, 경건공이라 불린기욤 1세 다키텐 공작은가톨릭 교회의 모원처럼 소박하게 지으려했다. 부르군드의 사냥용 숲을 기부하면서 윌리엄은 클뤼니 수도원을 예배보다는 내세의 임무로부터 그와 그의 가족을 위한 수도원으로 개방하였다. 동시대의 후원자들은 일반적으로 소유권을 유지하고 자신의 가족 중에서 수도원장의 배정하였으나, 윌리엄은 베르노를 수도원장으로 임명하고 수도원 생활의 자유를 불어넣어 클뤼니 개혁을 시작하였다. 클뤼니 개혁에서 주목할만한 지도자들은 교황 우르반 2세와 여러 서양의 영주들이 있었으며, 이는 10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최초의 여성 성직자가 11세기부터 인정되었다.

 

<아를의 성 트로핌 대성당의 정면>, 1180년 경, 남 프랑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