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미술 - 1,400년대 초반의 중기 르네상스(2)
1400년 대 초반기에 이탈리아와 플랑드르(Flanders)의 미술가들이 이룩한 새로운 발견들은 유럽 전역에 파문을 일으켰다. 화가들과 그 후원자들은 다 같이 미술을 성경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데에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의 한 단면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데에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료되었다. 이 시기의 미술을 사로 잡았던 이 모험 정신은 중세와의 진정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그들 사이에 기사도의 이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왕이나 봉건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거기에는 그들 자신이 어떤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의 옹호자라는 생각은 들어 있지 않았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시민과 상인들로 구성된 도시가 점차 봉건 영주의 성(城)보다 중요한 것으로 발전하게 되자 이러한 모든 점들도 점차 변해갔다. 상인들은 모두 그들이 태어난 고향의 말을 했고 타국의 경쟁자나 침입자들에게는 일치 단결해서 대항했다.
각 도시는 교역과 산업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지위와 특권에 자부심을 갖고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중세에는 훌륭한 거장이라면 이 건축 현장에서 다른 현장으로 옮겨다니며 작업할 수 있었고, 한 수도원에서 추천받아 다른 수도원으로 갈 수도 있었으며, 그의 국적이 어디인지 물어보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도시들이 큰 세력을 얻게 되자 미술가들은 다른 직공이나 장인들처럼 길드(guild)를 조직했다. 이 길드는 여러가지 면에서 오늘날의 노동조합과 유사하다. 길드의 임무는 조합원의 권리와 특권을 보호하고 그들의 제작품을 판매하기 위한 안전한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길드에 가입하기 위해 미술가들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 했는데, 다시 말하자면 그가 하나의 기술면에서는 완전하게 익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에 그는 자기의 공방을 열 자격이 있었고, 견습공들을 고용해서 제단화, 초상화, 채색된 가구, 깃발과 문장(紋章) 등의 주문을 받을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길드와 시의회는 보통 시의 행정에 대해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가장 부유한 집단으로, 그들의 도시를 번창하게 만드는데 일조할 뿐만 아니라 도시를 미화하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피렌체와 다른 도시의 길드들, 예를 들어 금세공사, 모직물 업자, 무기 제조자 등의 길드들은 그들 기금의 일부를 교회 설립이나 조합의 건물을 짓는데, 그리고 제단과 예배당을 세우는 헌금으로 바쳤다. 반면에 그들은 회원들의 권익을 열심히 보호했으며 따라서 다른 지방의 미술가가 일자리를 얻거나 그들 사이에 정착하지 못하게 하였다. 단지 가장 유명한 미술가들만이 때때로 이 저항을 물리치고 대성당들이 건축될 시절에나 가능했던 것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일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 시기에는 미술이 각기 다른 여러 유파(流派 : school)들로 분열되어 이탈리아, 플랑드르, 독일 등지의 모든 도시나 마을에는 그 나름의 '회화 유파'가 생겨났다. 그 당시에는 젊은 학생들이 다닐 수 있는 미술 학교 같은 것은 없었다. 만약 한 소년이 화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의 아버지는 그를 아주 어릴 때부터 그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거장 밑에 견습생으로 보낸다. 그는 보통은 그 거장의 집에서 먹고 자며 주인집의 심부름도 해야 하고 가능한 모든 면에서 쓸모있는 일꾼으로 성장해야 했다.
견습생이 처음에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스승이 사용할 물감을 개거나 나무 패절이나 캔버스를 준비해두는 것이었다. 점차 그에게는 깃대를 그리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이 주어지게 된다. 그런 다음에 어느 날 스승이 몹시 바쁠 때 그는 견습을 하는 제자에게 작품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 예를 들어 이미 윤곽을 그려놓은 곳에 색칠을 하거나 그 장면에 나오는 구경꾼들의 옷을 마무리하는 그런 일을 주게 된다. 만약 그때 그가 재능을 보이고 스승의 양식을 완전하게 모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면 점차로 그에게는 보다 중요한 일, 즉 스승의 스케치를 가지고 그의 감독하에 그 그림 전체를 완성시키는 것과 같은 일이 주어지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1,400년대의 '회화의 유파'들이었다. 이런 유파들은 사실 훌륭한 미술 학교들이었다. 이 시기의 그림은 그림 자체만 보아도 그것이 피렌체의 것인지 또는 시에나인지, 디종 또는 브뤼주,쾰른 또는 비엔나의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다.
이 엄청나게 다양한 거장들과 '유파'들, 그리고 그들이 시도한 실험들을 한 눈에 개관할 수 있는 유리한 장소를 얻기 위해서는 미술의 위대한 혁명이 시작된 피렌체로 되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다.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 마사치오의 뒤를 이은 다음 세대가 이들의 발견들을 어떻게 이용하려고 노력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당면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것을 어떻게 응용했는지를 살펴보는 것 또한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미술 후원자들이 주문하는 주된 일들은 그 이전 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새롭고 혁명적인 방법들은 재래의 인습적인 주문과 충돌할 때가 많았다.
건축의 경우에서 예를 들어 보자. 브루넬레시키의 생각은 그가 로마의 유적에서 복제한 원주, 박공,처마 장식띠(comice)와 같은 고전적인 건축 형식들을 도입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그의 교회 건물에 이런 형식들을 응용했다. 그의 후계자들은 이런 점에서 그를 모방하려고 애썼다.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 1404 -1472)가 설계한 교회인데, 그는 이 교회의 정면을 로마 풍의 거대한 개선문처럼 설계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피렌체의 루첼라이 대저택>, 1460년경
알베르티가 피랜체의 부유한 상인 루첼라이(Rucellai) 집안을 위해서 대저택을 지었을 때 그는 통상적인 3층 건물을 설계했다.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가 권장한 고전적인 형식을 사용하여 정면을 장식했다. 그는 원주나 반 원주를 세우는 대신에 건물의 구조를 변경시키지 않으면서 고전적인 기둥의 양식을 암시하는 판판한 벽기둥(pilaster)과 엔타블레이처(entablature)를 그물처럼 엮어서 건물 전체를 덮었다. 알베르티가 어디에서 이러한 원리를 배웠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각 층마다 상이한 그리스의 기둥 양식을 사용했던 로마의 콜로세움을 기억한다. 콜로세움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에서도 제일 아래층에서는 그리스의 도리아식 기둥 양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또한 벽기둥 사이에는 아치를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의 형식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옛 도시의 대저택에 현대적인 모습을 부여했다고 해서 알베르티가 고딕 전통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었다. 이 대저택의 창문들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면에 있는 창문들을 비교해보기만 해도 예기치 않은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알베르티는 소위 '야만적인' 첨형 아치를 부드럽게 만들고 또 고전적인 기둥 양식의 요소들을 재래의 인습적인 형식 안에 채택함으로써 단지 고딕 식 설계 방식을 고전적 형식으로 '번안했을' 뿐이었다. 알베르티의 이런 업적은 전형적인 것이다. 1,400년대 피렌체의 화가나 조각가들은 새로운 고안을 오래된 전통에 맞도록 조화시켜야만 하는 그런 처지에 놓일 때가 많았다.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고딕 전통과 근대적인 양식 사이의 절충은 1,400년대 중엽의 많은 거장들의 특징이었다.
로렌초 가베르티, <세례받는 그리스도>, 1427년, 청동에 금도금, 60 x 60 cm, 시에나 대성당의 세례반 부조
새로운 업적과 재래의 전통을 조화시키는 데에 성공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는 도나텔로와 같은 세대의 조각가인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 1378~1455)를 들 수 있다. 위 사진은 도나텔로가 만든 <헤롯 왕의 잔치>가 있는 시에나 대성당의 동일한 세례반을 위해서 만든 부조 가운데 하나이다. 도나텔로의 작품에서는 모든 것이 다 새롭다고 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베르티의 작품을 처음 보아서는 그렇게 놀랄 만한 것이 많지 않다. 우리는 이 장면의 구성이 12세기 리에주의 유명한 놋쇠 주물공의 배치 방식과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세례 요한과 구원의 천사들을 데리고 중앙에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와 비둘기는 하늘에 있다. 세부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도 기베르티의 작품은 중세의 선구자들의 수법을 연상시킨다. 도나텔로 처럼 기베르티도 각 인물상에 특징을 주어 그들이 행한 역할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예수의 아름다움과 겸손함, 광야에서 해방된 예언자 세례 요한의 엄숙하고 힘찬 몸짓, 그리고 기쁨과 놀라움으로 서로 조용히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천사들.
기 베르티가 당대의 새로운 발견들을 이용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고딕 미술의 이념에 충실했던 것 처럼 피렌체 부근 피에솔레(Fiesole)의 위대한 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 1387~1455)도 주로 종교 미술의 전통적인 이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마사초의 새로운 방법들을 응용했다. 프라 안젤리코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수사(修士)로서 그가 1440년경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 그린 프레스코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에 속한다. 그가 각 수도사들의 방과 복도 끝마다 그려 놓은 성화(聖畫)들을 감상하며 이 오래된 건물의 정적 속을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걸어가다 보면 이러한 작품들을 구상했던 그런 정신이 느껴지는 것 같다. 위의 그림은 그가 어느 수도사의 방에 그려놓은 <수태고지> 그림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원근법을 구사하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즉각 알 수 있다. 성처녀가 무릎을 꾾고 있는 회랑(回廊)은 마사초의 유명한 프레스코의 둥근 천장만큼 실감나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벽에 구멍을 뚫는 것'이 프라 안젤리코의 주된 의도는 분명히 아니었을 것이다. 1,300년대의 시모네 마르티니 처럼 그는 단지 성화를 아름답고 단순하게 그리고 싶었을 뿐이다.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에는 거의 운동감이 없으며 실재의 단단한 인체를 암시해주는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그림이 지닌 겸손한 분위기 때문에 보다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이 위대한 미술가의 겸손함이야말로 브루넬레스키와 마사초가 미술에 도입했던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근대적인 새로운 표현법을 과시하지 않았던 이유인 것이다.
부러진 창과 죽은 병사들의 놓인 방향이 원근법의 꼭지점을 향해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지닌 매력과 어려움은 또 한 사람의 피렌체 화가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 1397~1475)의 작품에서 검토해 볼 수 있다. 산로마노의 전투는 1432년 6월 1일 일요일 산 로마노 언덕에서 피렌체 군과 시에나와 밀라노 연합군과의 전투를 그린 그림입니다. 산로마노의 전투는 총 3개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하룻동안 벌어진 강렬하고 참혹했던 전투를 표현합니다. 먼저 가장 첫 번째 그림은 영국 국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고 전투의 시작인 오전을 그린 그림입니다. 당시 피렌체는 굉장히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고 병역을 돈이나 노동으로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병역을 하지 않아 용병에 의지하는 부분이 컸습니다. 당시 용병 대장, 콘도티에리(Contract에서 유래된 단어)는 명예도 높았고 보수도 높았다고 합니다.

당시 피렌체 군을 이끌던 니콜로 다 톨레티노는 빠른 결단과 행동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4000명이었던 피렌체 군은 2배가 넘는 연합군을 맞이하는데 톨레티노는 갑옷조차 모두 입지 않은 체 상대 진영으로 돌격했다고 합니다. 동시에 2명의 전령을 코티노라에게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림에서 투구를 쓰지 않은 톨레티노와 두명의 전령의 그림으로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당시 피렌체 군대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와 벌렸던 전투 중의 하나로 그들의 적을 통쾌하게 짓밟았던, 산 로마노의 대승(大勝)을 그린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이 그림은 매우 중세풍으로 보인다. 갑옷에 길고 무거운 창을 들고 마치 마상 경주에 출전하는 것 같은 기사들은 중세의 기사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또한 이 장면을 표현한 방법도 그렇게 현대적이지 않다. 말과 사람들이 마치 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들처럼 보이고 쾌활한 분위기도 전쟁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만약 왜 말들이 회전 목마처럼 보이며 전체 장면도 인형극과 같은 것을 연상시켜 주는지 그 이유를 자문해 본다면 매우 기묘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그림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정오를 보여주며 작품 중 유일하게 파올로 우첼로의 서명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화가 자신이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에 너무나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인물들이 그려진 것이 아니라 마치 조각된 것처럼 공간에 돌출되어 보이도록 최선을 다했다. 우첼로는 원근법의 발견에 너무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밤낮으로 사물들을 단축법으로 그려보고 자신에게 새로운 과제들을 제기해보곤 하였다. 그는 "원근법이란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가!" 우리는 이 그림에서 그런 심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우첼로는 틀림없이 땅에 흐트러져 있는 여러 가지 무기들을 정확한 단축법으로 그리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가 가장 크게 자부심을 느꼈던 것은 아마도 땅에 쓰러져 있는 전사자의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인물상은 그 이전에는 한번도 그려진 적이 없었다.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 너무 작게 보이긴 하지만 이것이 불러일으켰을 파문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세 번째 그림은 피렌체 지원군이 도착한 오후를 그린 그림이며 현재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우리는 화면 전체에서 우첼로가 원근법에 대해 얼마나 흥미를 느꼈으며 그것이 그의 마음을 얼마나 사로잡았는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심지어 땅에 흩어져 있는 부러진 창들까지도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전쟁이 마치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인위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바로 이와 같은 정연한 수학적인 배치 방법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기사들이 등장하는 이 장면에서 눈을 돌려 반 에이크의 기사 그림이나 랭부르의 세밀화와 비교해 본다면 우첼로가 고딕 전통에서 무엇을 배웠으며 또 그것을 어떻게 변형시켰는지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북 유럽의 반 에이크는 관찰을 통해 얻은 세부들을 점차 더해가고, 또한 가장 사소한 음영까지도 사물의 세세한 면을 그대로 모사함으로써 고딕 양식을 '국제 양식'으로 변화시켰다.
반면 우첼로는 이와 정 반대의 접근 방법을 택했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원근법에 의해서 그림 속의 인물들이 입체감 있고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실감나는 무대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인물들은 분명히 입체감이 살아 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어딘가 이중 렌즈을 통해서 보는 입체경(stereoscope)의 영상을 연상시킨다. 우첼로는 엄격한 원근법적 묘사로 인한 거친 윤곽선을 부드럽게 해주는 명암과 공기의 효과를 구사하는 방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영국의 국립 미술관에 있는 원화를 직접 보면 잘 못된 그림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기하학을 그림에 응용하는 데 지나치게 몰두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첼로는 진정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동방박사는 메디치 가문의 수호 성인으로 가문에서는 동방박사 형제회의를 후원하고 거창하게 축제일 행사를 치르곤 했다. 조반니의 아들 피에로 메디치(1416~1469)는 리카르디궁 예배당의 장식화로 그들 가문의 국제적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던 1439년의 피렌체 종교회의를 기록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자신과 아버지, 그리고 장래 피렌체를 다스리게 될 로렌초를 동방박사 일행으로 그려 달라고 부탁한다. 고촐리는 코시모의 총애를 받았던 수도사 화가 프라 안젤리코의 수제자로 산마르코 수도원에 있는 메디치 가문의 기도실에 ‘동방박사의 경배’(1440~1443)를 그린 바 있다.
동방박사가 예수께 경배하는 이야기와 메디치 가문의 외교적 업적인 종교회의를 한데 엮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지만 고촐리는 주문자의 의중을 충실하게 헤아려 5년의 시간을 들여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완성한다. 1463년 완성된 메디치 예배당의 벽화 ‘동방박사의 행렬’은 사실적인 디테일과 생생하고 화려한 색채로 뒤덮여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크지 않은 공간에 3개의 벽면을 장식한 그림의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15세기 복장을 한 당대의 실존 인물들로 채워져 있어 볼수록 흥미롭다. 동쪽 벽면에는 황금빛 옷을 입은 젊은 왕이 수많은 수행원들을 이끌고 화려하게 장식된 흰 말을 타고 예수를 보러 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앳된 얼굴이 정면을 향해 있는 이 어린 동방박사는 코시모의 손자이자 피에로의 아들인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다. 고촐리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10세 정도에 불과했지만 어릴 때부터 남다른 리더십과 용기, 총명함으로 가문에서 큰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그 뒤의 흰말을 탄 이가 로렌초의 아버지 피에로다. 그 오른편에 흑인 시종이 이끄는 갈색 당나귀를 타고 있는 인물이 ‘국부’ 코시모다. 코시모는 피렌체 시민들이 지닐 수도 있는 부유층에 대한 적대감과 귀족들의 견제와 질투를 의식해 당나귀를 애용했다고 전해진다.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
그림을 주문한 피에로는 어려서부터 약골이어서 병을 달고 살았던 까닭에 ‘통풍환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자신의 생명이 오래가지 않을 것을 예견했기 때문인지 피에로는 종교회의 당시엔 태어나지도 않았던 자신의 어린 아들 로렌초를 맨 앞에 세워 장래에 피렌체를 이끌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다. 실제로 피에로는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의 통수권을 이어받았으나 2년 만에 병사하면서 로렌초에게 통수권을 넘겨야 했다. 40여년간 피렌체를 통치한 로렌초는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피렌체가 이탈리아 정치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하는 한편 예술과 철학 등 인문학 연구를 장려했다. 피렌체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르네상스 문화가 최고조에 이른 것은 로렌초가 통치하던 시기다. 사람들은 그를 로렌초 일 마그니피코, 즉 ‘위대한 자’로 칭송했다.
한편 피렌체 남쪽과 북쪽의 도시에 사는 화가들도 도나텔로나 마사초의 새로운 미술의 의미를 받아들여서 어쩌면 피렌체 미술가들보다 그것에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골몰했던 것 같다. 그 중에는 유명한 대학촌인 파도바(Padova)에서 작업하다가 그 후 만토바(Mantova)의 영주의 궁전에서 일했던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 1431~1506)가 있다. 파도바와 만토바는 모두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도시이다. 지오토가 유명한 프레스코를 그렸던 성당 근처에 있는 파도바의 한 교회에서 만테냐는 성 야고보의 전설을 설명하는 일련의 벽화들을 그렸다. 그 중에 하나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성 야고보를 묘사하고 있다. 성 야고보가 끌려들어 온 성문은 로마의 개선문으로, 호송하는 군인들도 모두 고전 시대의 기념상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로마 군대의 복장과 동일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 장면 전체에서 엄격한 단순성과 장대함을 가진 로마 미술의 정신이 넘쳐흐르고 있다.
대략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베노초 고촐리의 피렌체 프레스코와 만테냐의 작품들처럼 그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의 인물들은 마사초의 인물들처럼 조각적이고 인상적이다. 마사초처럼 그는 원근법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열심히 이용했다. 만테냐는 그의 인물상이 단단하고 형체가 있는 존재들처럼 서 있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무대를 창출하기 위해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마치 능숙한 연극 연출가가 하듯이 인물들을 배치함으로써 그 사건이 일어난 순간의 의미와 과정을 전달하려 하였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성 야고보를 호송하는 행렬이 잠시 멈추었다. 왜냐하면 박해자들 중의 한 사람이 죄를 뉘우치고 성인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성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성인은 조용히 돌아서서 그 사람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고 로마 군인들은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만테냐가 북부 이탈리아에서 미술의 새로운 기법을 이렇게 응용하고 있을 때 이 시기의 또 다른 위대한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 1416 - 1492)는 피렌체의 남쪽 지방 도시인 아레초(Arezzo)와 우르비노(Urbino)에서 이와 동일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사초의 그림에 나오는 둥글고 입체적인 인물상들은 명암으로 힘있게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피에로 프란체스카만큼 분명하게 이 새로운 수단이 갖는 엄청난 가능성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이 그림에서 빛은 인물들의 형상을 이루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원근법과 대등한 중요성을 지닌다. 앞에 서있는 군인은 밝게 비추어진 천막 입구를 배경으로 어두운 실루엣으로 처리되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이 군인들과 천사로부터 발산되는 빛을 받고 앉아있는 호위병과의 거리를 짐작할 수 있다. 천막의 둥근 형태와 그 내부의 텅빈 공간은 단축법과 원근법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빛을 수단으로 해서 느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빛과 그림자들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계시를 받고 있는 깊은 밤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창조해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마사치오의 후계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피에로를 꼽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상적인 단순성과 고요함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피렌체의 미술가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Antonio Pollaiuolo : 1432-1498)가 이 새로운 문제, 즉 소묘에 있어서도 정확하며 구성에 있어서도 조화로운 그림을 그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재치나 본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확한 규칙을 통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최초의 시도이다. 이 그림은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장면이다. 성인은 나무 기둥에 매달려 있고 여섯 명의 사형 집행인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다. 이 여섯 명의 사형 집행인들은 뾰족한 삼각형 구도 속에 매우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각각 좌우 대칭으로 비슷한 모습으로 대비되어 있다. 사실상 이 배치는 지나치게 딱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분명하고 좌우대칭적이다. 화가는 그러한 결함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변화를 주려고 노력했다. 즉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장착하는 집행인 중의 한 사람은 정면에서 그리고 그와 대칭을 이루는 사람은 뒷 모습을 그렸다. 활을 쏘고 있는 사람들도 이와같이 엄격한 좌우대칭으로 그렸다.
화가는 이처럼 단순한 방법으로 구성의 생경한 좌우 대칭을 완화시키고, 마치 음악 작품에서 처럼 운동과 반운동(反運動)
의 느낌을 도입하려고 시도하였다. 배경에 있는 토스카나의 풍경은 원근법을 이용하여 훌륭히 묘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주제와 배경은 사실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순교가 집행되고 있는 전경의 언덕과 배경의 풍경을 연결시키는 길은 하나도 없다. 폴라이우올로의 그림은 1,400년대 미술가들의 작업실에서 틀림없이 논의 되었을 그런 종류의 문제들을 보여준다. 한 세대 뒤에 이탈리아 미술이 그 최고의 정점에 도달하게 된 것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 1446 - 1510)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한 1,400년대 후반의 피렌체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는 기독교의 전설이 아닌 고전 시대의 신화, 즉 <비너스의 탄생>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다. 고전기의 시인들은 중세 전반을 통해서도 알려지기는 했지만 고전기의 신화는 과거의 위대했던 로마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그처럼 열성적이었던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교육받은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이들에게 존겨하는 그리스와 로마 인들의 신화는 유쾌하고 아름다운 동화 이상의 것이었다. 그들은 고대 사람들의 탁월한 지혜에 대해 대단한 확신을 가졌으므로 이 고전기의 전설들이 어떤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진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보티첼리에게 그의 별장을 장식할 이 그림을 주문한 후원자는 권세있고 부유한 메디치 가의 일원이었다. 아마도 그 사람 자신이거나 아니면 학식이 있는 그의 친구 중 한 사람이 화가에게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비너스를 묘사하는 고대인의 방식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설명해주었을 것이다. 이들 학자들에게 비너스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미(美)의 신성한 의미가 이 세상에 전해지는 신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화가는 이 신화를 품위있는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작업에 밈했을 것이다. 그림에 묘사된 행동은 쉽게 이해된다.
비너스는 조개 껍질을 타고 바다에서 솟아나 장미꽃 세례를 받으며, 바람의 신들에 의해 해안으로 밀려온다. 비너스가 땅에 발을 내딛으려 하자 님프 중의 하나가 외투를 들고 그녀를 맞이한다. 폴라이우올로가 실패한 바로 그것을 보티첼리는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의 그림은 완벽하게 조화된 화면을 이루고 있다. 보티첼리의 인물들은 보다 덜 단단해보인다. 그의 인물들은 폴라이우올로나 마사초의 인물들처럼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우아한 운동감이나 선율적인 선들은 기베르티나 프라 안젤리코의 고딕 전통, 또는 앞에서 우리가 부드러운 육체의 곡선과 섬세한 옷주름의 흐름을 언급한 바 있는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나 프랑스 금 세공사의 작품과 같은 1,300년대의 미술을 상기시켜준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너무나 아름답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목이 부자연스럽게 길다거나 어깨가 가파르게 처져 있다거나 또는 왼쪽 팔이 다소 어색하게 몸에 붙어 있다거나 하는 점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게 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을 지도 모른다. 즉 우아한 윤곽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자연에 구애받지 않은 보티첼리의 이러한 자유로운 표현은 하늘로부터 내려진 선물로서 우리 해변에 떠 밀려온 무한히 부드럽고 섬세한 존재에 대한 인상을 한층 드높여주고 있기 때문에, 화면의 아름다움과 조화에 보탬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이탈리아 미술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여러 전환점들이 있었다. 즉 1,300년대의 지오토의 발견이나, 1,400년경의 브루넬레스키의 발견들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러한 기법에 있어서의 혁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두 세기가 경과할 동안 미술에 일어났던 점진적인 변화일 것이다. 그 변화는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느끼는 것이 더 쉽다. 앞 장(章)에서 살펴본 중세의 필사본 삽화들과 1475년경 피렌체에서 제작된 삽화의 표본을 비교해보면 이 동일한 방법의 미술이 얼마나 서로 다른 정신으로 이용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피렌체의 거장이 외경심이나 신앙심이 모자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예술이 획득한 바로 그 힘 자체가 그로 하여금 미술을 성경 이야기의 의미를 전달하는 단순한 수단으로만 생각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그는 그 힘을 이용하여 부와 사치를 화려하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삶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보다 풍부하게 해 주는 미술의 이와같은 기능이 전적으로 잊혀졌던 시대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탈리아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시대가 도래하면 그 기능은 점점 더 전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