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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 - 북유럽의 고딕 미술(1)

서양 미술 이야기 이교수 2023. 11. 17. 21:40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400년대는 미술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그것은 피렌체에서 브루넬레스키 세대가 이룩한 발견과 혁신이 이탈리아의 미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으며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분리되는 미술의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1,400년대의 북유럽의 미술가들이 목적으로 했던 바가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그것과 아마도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 수단과 방법에 있어서는 대단히 달랐다.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차이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분야는 건축이었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축물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적인 모티브를 사용하는 르네상스적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피렌체에서의 고딕 양식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이탙리아 이외의 나라에서 미술가들이 그의 예를 따른 것은 그로부터 한 세기나 뒤의 일이었다. 이들 나라에서는 1,400년대 내내 전 세기의 고딕 양식을 계속 발전시켜 갔다. 이러한 건물들의 형태는 뾰족한 아치나 공중 부벽과 같은 고딕 건축의 전형적인 요소들을 아직도 간직하고는 있었지만 시대적인 취향은 크게 바뀌고 있었다. 우리는 1,300년대의 건축가들이 우아한 레이스 세공과 같은 형태의 풍부한 장식들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엑서터 대성당의 창문에 디자인된 '장식적 양식'도 기억하고 있다. 1,400년대에는 복잡한 트레이서리와 환상적인 장식에 대한 이러한 취향이 더욱 강해졌다.

 

고딕 양식이 쇠퇴하면서 건물 규모가 작아지고 장식이 많아지게 되었다. 후기 고딕은 이 기준에 따라 다시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1240~1400년의 레요낭(Rayonnant) 양식으로 ‘태양이 이글거리는 것 같은’이라는 뜻이다. 후반부는 1400~1550년의 플랑부아양(Flamboyant) 양식으로 ‘불꽃이 타는 것 같은’이라는 뜻이다. 모두 후기 고딕의 화려한 장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명칭이며 장식어휘는 주로 바 트레이서리를 이용해서 창틀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장식화 경향은 일반적인 후기 양식에 나타나는 ‘장식을 위한 장식’ 이외에 다른 목적도 추가로 가졌다. 실내에 빛을 더 많이 유입하기 위해 벽체를 변화시키는 과정에 수반된 현상이기도 했다.

 

 

프랑스 루앙의 법원 안뜰, 1482년, <플랑부아양 고딕 양식>

 

 

루앙시의 법원 건물

 

프랑스 루앙의 법원 건물

 

프랑스 루앙의 법원 건축물은 '플랑부아양(Flamboyant : 타오르는 불꽃 모양) 양식'이라고도 불리워지는 프랑스 고딕 양식의 최후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의 설계자는 변화무쌍한 장식물로 건물 전체를 뒤덮어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건물들은 무한히 풍요롭고 새로운 창안으로 가득찬 동화의 세계와 같은 요소가 넘쳐 흐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건축물들에서 설계자들이 고딕 건축의 마지막 가능성까지 다 소진해버렸으므로 그 반작용이 조만간 뒤이어 일어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이탈리아의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어도 북유럽의 건축가들이 보다 더 큰 단순미를 갖는 새로운 양식을 발전시켰으리라는 징후가 보이기도 한다.

 

루앙의 생 마끌루 성당 정면, <플랑부아양 고딕 양식>

 

루앙의 생 마끌루(St. Maclou, 네이브 1434-70년경, 파사드 1477-1514)는 플랑부아양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전체 길이가 54미터, 천장 고는 22.5미터로 전성기 고딕 성당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네이브 월은 다시 3단 구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케이드 층의 높이가 절반을 차지했기 때문에 실내에 서면 2단 구성처럼 느껴졌다. 아케이드 층과 위쪽 두 층 사이의 조도 차이가 심했기 때문에 이런 느낌은 더 심했다. 트리포리엄과 천측창은 아치 열로 구획되었다. 각 아치는 다시 플랑부아양 양식의 전형적인 장식 어휘로 처리되었다.

 

외관에서는 장식 어휘가 더욱 풍부하게 쓰였다. 건물이 낮아졌는데 큰 출입구를 세워서 출입구가 건물 높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파사드에서는 장식을 더할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건물 본체의 매스와 출입구를 분리했는데 박공이 특히 그랬다. 공중에 홀로 서 있는 별도의 삼각형 벽체로 처리한 뒤 그 속을 바 트레이서리를 이용해서 플랑부아양 장식으로 분할했다. 면은 사라지고 플랑부아양 장식을 새기는 곡선 트레이서리만 오가면서 박공은 투명 막이나 스크린처럼 변했다.

 

 

파리의 왕궁내 성당 <생 샤뻴 성당의 플랑부아양 고딕 양식> 성당 내부 모습.

 

파리의 왕궁 예배당인 쌩 샤뻴(St. Chapelle, 1241~48)은 레요낭 양식의 절정에 해당된다. 1485년에는 플랑부아양 양식의 장미창이 서쪽에 더해졌다. 전체 구성부터 고딕의 전형적인 교회 형식을 벗어났다. 아헨 왕궁 예배당과 랭스의 대주교 예배당을 혼합한 형식이었다. 왕의 옥좌와 귀족의 자리를 2층과 1층으로 분리한 처리는 아헨을, 이것을 위 건물과 아래 건물의 별 층으로 구획한 것은 랭스를 각각 본뜬 것이다. 이런 자유로움은 벽체가 3분법에서 벗어나는 데에도 도움을 줬다. 위층 예배당의 벽체는 2분법이지만 아랫단이 매우 낮고 벽감으로 처리되어서 실제는 수직 창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창 하나당 손가락 비례처럼 기다란 랜싯 네 개와 원형 창 세 개로 분할되었다.

 

 

 

 

 

 

영국에서 소위 '수직 양식(Perpendicular Style)'으로 알려진 고딕 양식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런 경향들이 생겨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수직 양식이란 명칭은 장식에 있어서 그 이전 시대의 장식적인 트레이서리의 곡선과 아치보다 직선을 더 빈번하게 사용한 1,300년대 말과 1,400년대 초 영국 건축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하여 만들어진 말이다. 이 양식으로 가장 유명한 예는 1446년 착공한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의 형태는 그전 시대의 고딕 양식의 내부 형태보다 훨씬 더 단순하다. 측랑이 없기 때문에 기둥과 가파른 아치도 없다.  건물 전체에서는 중세의 교회라기 보다는 오히려 천장이 높은 홀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일반적인 구조가 대단히 소박하고 어찌보면 이전의 위대한 대성당들보다 더 세속적인 인상을 준다.          

킹스 칼리지 예배당 전면 모습

 

킹스 칼리지 예배당 천장 장식 모습.

 

이 고딕 예술의 장인의 상상력은 세부(細部), 특히 궁륭(穹窿)의 형태(부채 모양의 궁륭 ; Fan-vault)에 자유자재로 발휘되어 있다.  그러한 궁륭의 곡선과 가느다란 직선의 환상적인 교직(交織)은 켈트와 노섬브리아의 필사본의 기적적인 솜씨를 상기시켜준다.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 예배당> 내부 모습. <수직양식>

 

르네상스가 다른 어느 곳보다 이탈리아에서 승리를 거둔 반면, 1,400년대의 북유럽은 아직 고딕 전통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 에이크 형제의 위대한 혁신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여전히 과학의 문제라기보다는 관습과 관례의 문제로인식되고 있었다. 수학적 원근법의 이론, 과학적 해부학의 비밀, 로마 유적에 대한 연구 등등은 북유럽 거장들의 평온한 정신 상태를 동요시키지 않았다. 이런 이유에서 알프스 산맥 이남에 사는 그들의 동료 미술가들이 이미 '근대'에 속하는 반면 그들은 아직도 '중세 미술가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프스 이남이나 이북의 미술가가 당면한 문제는 놀랄 만큼 비슷한 것이었다.

 

얀 반 에이크는 그림 전체가 꼼꼼한 관찰로 꽉찰 때 까지 조심스럽게 세부를 하나씩 추가 함으로써 그림을 자연의 거울로 만드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프라 안젤리코와 베노초 고촐리가 마사초의 혁신들을 14세기 정신을 지키면서 구사하였던 것처럼 북유럽에서도 반 에이크의 혁신을 보다 더 전통적인 주제에 활용한 미술가가 있었다. 예를 들면 1,400년대 중엽에 쾰른에서 작업을 했던 독일 화가 슈테판 로흐너(Stefan Lochner : 1410-1451)는 어느 정도 북유럽의 프라 안젤리코라고 말 할 수 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장미 나무 아래에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꽃을 뿌리거나 아기 예수에게 과일을 건네는 작은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성모을 그린 매력적인 작품은 마치 프라 안젤리코가 마사초의 새로운 발견들을 알고 있었듯이 이 거장 또한 반 에이크의 새로운 방법들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그의 그림은 그 정신으로 보면 반 에이크에  가깝다기 보다는 오히려 고딕 양식의 <윌튼 두폭화>에 가깝다. 이 옛날 작품으로 되돌아가서 두 작품을 비교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는 당장에 두폭화를 그린 화가에게는 상당히 어려웠던 문제점을 로흐너는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슈테판 로흐너, <장미 그늘 아래의 성모>, 1440년경, 목판에 유채, 51 x 40cm, 쾰른 발라프 리아르츠 박물관

 

그의 그림 속의 인물들과 비교해보면 두폭화의 인물들은 다소 평면적으로 보인다. 로흐너의 성모도 여전히 황금색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그 앞에는 현실적인 무대가 펼쳐져 있다.  게다가 로흐너는 마치 액자에 걸려 있는 것같이 보이는 커튼을 치켜들고 있는 예쁘장한 두 천사를 그려 넣었다.러스킨(Ruskin)과 같은 19세기 낭만주의 비평가들과 라파엘 전파(前派) (Pre- Raphaelite Brotherhood)의 상상력을 맨 처음 사로 잡았던 그림들은 로흐너와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과 비슷한 그림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그림에서 순박한 신앙심과 어린이와 같은 꾸밈없는 마음씨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어떤 점에서는 그들이 옳았다. 그림에 있어서 현실적인 공간과 정확한 소묘에 다소 익숙해져 있는 우리로서는 그 작품들이 중세의 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의 중세 거장들의 작품보다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장 르 타베르니에 <'샤를마뉴 대제의 정복' 중 헌정 페이지>, 1460년경, 브뤼셀 왕립 도서관

 

위 삽화는 고촐리의 프레스코와 마찬가지로 1,400년대 중반에 그려졌다. 그림에는 저자가 완성된 책을 주문했던 그의 귀족 후원자에게 전달해주는 전통적인 장면이 보인다.  그러나 화가는 이 테마만으로는 진부하다고 생각해서 앞에 출입문을 설치하고 그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성문 뒤에는 막 사냥을 떠나려는 듯한 일행이 있는데 거기에는 손 위에 매를 올려놓고 있는 멋쟁이 한 남자와 그 주위에서 거만을 떠는 시민들이 서 있다. 성문 안과 앞에는 매점과 노점들이 보이는데 상인들은 물건을 진열해 놓고 있고 사는 사람들은 물건을 살펴보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중세 도시의 광경을 생생하게 그린 그림이다.  그때로부터 1세기 전에만 해도 이와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아니 그 이전의 어떤 시대에도 그렇게 그릴 수 없었다.

 

일상 생활을 이처럼 충실하게 그린 예를 찾아보려면 우리는 고대 이집트 미술로 돌아가야만 한다.아니 이집트 인들조차도 그들의 세계를 이렇게 정확성과 유머를 가지고 보지는 못했다. 앞에서 <메리 여왕의 기도서>에서 하나의 예로 보았던 익살의 정신이 일상 생활을 매력적으로 묘사한 이 그림들에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탈리아 미술에 비해서 이상적인 조화와 아름다움을 성취하는 데 관심을 적게 가졌던 북유럽의 미술은 이런 종류의 표현법을  점점 더 선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유파' 즉 이탈리아 미술과 북유럽 미술이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당시에 프랑스의 선진적인 화가의 한 사람인 장 푸케(Jean Fouquet : 1420-1480)가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를 방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1447년에 로마에 가서 교황을 그리기도 했다. 

 

샤를마뉴 대제

 

샤를마뉴(Charlemagne :  재위 768-814, 혹은 카를 대제, 카알 대제, 카롤루스 대제 라고도 불리운다)는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는 이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하여 각 부족이 시행하던 부족법전을 성문화(成文化)하여 각 부족의 독립성을 인정하였고, 아울러 중앙에서 순찰사 등의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적 지배를 가능하도록 하였다. 지방봉건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중세 여러 봉건국가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 실력을 배경으로 로마 교황권과 결탁하여 그리스도교의 수호자 역할을 하여 서유럽의 종교적인 통일을 이룩하였다. 800년에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로서 대관(戴冠)되었는데, 이 사건은 서유럽이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영향에서 명실공히 완전히 독립한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로마 고전문화의 부활을 장려하여 아헨의 궁정을 중심으로 알쿠인, 파울루스 디아코누스 등 성직자들이 활약하여 카롤링거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전문화 ·그리스도교 ·게르만 민족정신의 3요소로 이루어지는 유럽 문화가 샤를마뉴 시대에 이르러 개화(開花)되어, 유럽의 역사적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아래 그림은 장 푸케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지 몇년 뒤에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기증자의 초상이다.

 

장 푸케,<성 스테파누스와 함께 있는 프랑스 샤를 7세의 재무대신 에티엔 슈발리에>, 1450년경, 제단화 부분, 목판에 유채, 96 X 88cm, 베를린 국립 박물관 회화관

 

<윌튼 두폭화>에서와 같이 성인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를 올리는 기증자를 보호하고 있다. 기증자의 이름이 에티엔이므로 그 옆에 서 있는 수호 성인은 로마 교회의 수석 부제(副祭)로서 부제의 의관을 갖추고  있는 성 스테파누스이다. 그가 들고 있는 책 위에는 큰 돌이 하나 얹혀져 있는데 성경에는 그가 돌로 쳐죽임을 당했다고 되어있다. <윌튼 두폭화>를 돌이켜 보면 불과 반 세기 동안에 자연을 묘사하는 데 미술이 얼마나 많은 발전을 해 왔는지 얼 수 있다.  <윌튼 두폭화>의 성인들과 기증자는마치 종이에서 오려내어 그림에 붙인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장 푸케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은 마치 조각처럼 다듬어진 것 같이 보인다.  <윌튼 두폭화>에서는 명암을 찾아볼 수 없다. 푸케는 빛을 사용하고 있다. 이 조용하고 조각과 같은 인물들이 현실적인 공간에 서 있는 방식은 푸케가 이탈리아의 작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피, 돌, 옷감, 대리석 등 사물의 질감과 표면에 그가 갖는 관심을 보면 그의 미술이 얀 반 에이크의 북유럽 전통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보여준다.  

 

로마을 방문한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북유럽의 화가는 로지 에르 반 데르 웨이든(Rogier van der Weyden : 1400 - 1464) 이었다. 이 거장에 관해서는 그 얀 반 에이크가 작업했던 플랑드로에서 큰 명성을  누리며 살았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음 그림은 십자가에서 예수를 내리는 장면을 그린 대형 제단화이다. 우리는 로지에르가 반 에이크와 같이 머리카락 하나하나, 바느질 솔기 하나하나 등 모든 세부를 충실하게 재현할 수 있었음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은 현실적인 장면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그는 중간 색조의 배경을 등진 일종의 얕은 무대 위에 인물들을 배치한다. 폴라이우올라가 직면했던 문제들을 되새겨보면 우리는 로지에르가 내련 결정이 현명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또한 멀리서 보게 될 대형 제단화를 제작해야 했으므로 교회안의 신자들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눈 앞에 전개시켜 보여주어야 했다.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435년경, 제단화, 목판에 유채, 220 x 262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그것은 윤곽이 뚜렷하고 화면 전체의 구성도 만족스러워야 했다. 로지에르의 그림에서는 폴라이우올로의 작품처럼 어색하고 자의적으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요구들을 충족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신을 보는 사람 쪽으로 돌리고 있는 예수의 몸이 그림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울고 있는 여인들이 이 중심부를 둘러싸고 있다.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성 요한은 옆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기절을해서 쓰러진 성모를 부축하려고 헛되이 노력하고 있다. 성모의 동태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의 몸과 일치한다. 늙은이들의 조용한 태도는 주연 배우들의 인상적인 제스쳐를 효과적으로 돋보이게 해준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중세의 대작들을 연구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매체안에 그대로 모방하려는 영감을 받은 연출가가 연출한 신비극(神秘劇)이나 활인극(活人劇)에 실제로 나오는 배우들처럼 보인다. 이러한 방법으로 고딕 미술의 주요 개념들을 새로운 사실적인 양식으로 번안함으로써 로지에르는 북유럽의 미술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그가 없었더라면, 얀 반 에이크의 발견들로 인한 충격으로 없어졌을지도 모를 명확한 화면 구성의 전통을 상당 부분 보존했다. 그 뒤로 북유럽의 화가들은 나름대로 미술의 새로운 요구와 미술이 오랫동안 복무해온 종교적인 목적을 융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우리 이러한 노력을 1,400년대 후반에 가장 위대한 플랑드르의 화가 중의 한 사람인 후고 반 데르 후스(Hugo van der Goes : 1482년 사망)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당시의 북유럽 화가들 가운데 개인적인 일화들이 전해져오는 몇 안되는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인데, 만년에 자진해서 어떤 수도원에 은거하여 죄책감과 우울증에 사로잡혀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사실 그의 미술에는 얀 반 에이크의 평온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 긴장되고 진지한 것이 있다.  아래 그림은 그의 작품이다. 무엇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성모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는 12사도들의 다양한 반응을 묘사한 그 훌륭한 솜씨이다. 조용하게 생각에 잠겨있는 사람, 격렬하게 슬퍼하는 사람과 경솔하게 하품을 하는 사람의 표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표정들을 매우 탁월한 솜씨로 묘사하고 있다.

 

 

 

후고 반 데르 후스, <성모의 임종>, 1480년경, 제단화, 목판에 유채, 146.7 x 121.1cm, 브뤼주 박물관
성모 승천

 

반 데르 후스의 그림에서는 화가가 우리의 눈앞에 현실의 장면을 떠 올려 주기 위해, 그러면서도 화면의 어떤 부분도 텅 비거나 무의미하게 내버려두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인물들의 움직임을 어딘가 왜곡되어 보이게 만드는 이러한 시각적인 변형은 그녀를 받아들이기 위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아들 예수의 환영을, 방 안에 가득한 사람들 중에서 오직 홀로 볼 수 있도록 허락된 죽어가는 성모의 조용한 모습을 둘러싸고 있는 긴장된 흥분감을 더욱 고조시켜 주고 있다.

 

조각가들과 목각사(木刻師)들에게는 고딕 양식을 새로운 형식 속에 잔존케 한 로지에르의 업적이 특히 중요한 것으로 판명 되었다. 아래 그림은 폴란드의 크라쿠프시를 위해서 1447년에 주문된 목각 제단이다. 이 제단을 만든 거장은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1533년에 고령으로 그곳에서 죽은 바이트 슈토스(Veit Stoss)이다. 멀리 떨어져서 이 제단을 보게되는 집회의 신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주요 장면들의 의미를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다.  중앙의 제단은 12사도들에게 둘러싸인 성모의 임종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그림에서는 성모가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그려져 있다. 바로 그 위에서는 그녀의 영혼이 예수에  의해 천당으로 인도되는 장면이 있고 또 꼭대기에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 성모에게 왕관을 씌여주고 있는 장면이 계속되고 있다. 

 

바이트 슈토스 < 성모 마리아 교회당 제단>, 1477-1489, 폴란드 크라쿠프, 채색 목조, 높이 13.1m.

 

위 제단화의 <사도의 머리 부분>
바이트 슈토스, <성모 마리아 교회당 제단>, 1477-89년, 폴란드 크라쿠프, 채색 목조, 높이 13.1m
제단화의 일부.

 

 

 

제단화의 일부.

 

제단의 양 옆 날개에는 왕관을 씌우는 장면과 함께 소위 마리아의 일곱 가지 기쁨이라고 알려져 있는 성모의 생애 중 중요한 순간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 일련의 이야기는 수태 고지를 표현한 왼쪽 상단의 사각형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내려오면서 예수의 탄생과 동방 박사들의 경배로 이어진다. 오른 쪽 날개에서 우리는 많은 슬픔 끝에 남은 세 가지 즐거운 일들, 즉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절에 성령이 쏟아져 내리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성모 축일에 성당에 모인 신자들은 이 이야기를 보고 묵상한다. 그러나 신자들이 제단에 좀더 가까이 다가올 수 있다면 그들은 사도들의 머리와 손 등을 놀랍게 처리한 바이트 슈토스의 예술의 진실성과 표현력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1,400년대 중엽에 독일에서는 미술 뿐 아니라 인쇄술의 발명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목판화 기술이 발명되었다. 누구나 목판화를 하나 선택해서 인쇄 후에 나타나지 않을 부분을 모두 칼로 도려내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최종 제품에서 하얗게 보일 부분은 다 파내고 검게 나타날 부분만 좁은 선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그리고 기름과 검댕이를 섞어서 만든 인쇄 잉크를  그 표면에 바르고 그 위에  종이를 눌러 찍는 것으로 목판 하나로 많은 양을 찍어 낼 수 있다. 그림을 인쇄하는 이 간단한 기술을 목판화술(木版術, Woodcut)이라고 한다. 목판화를 여러 장 함께 사용하여 그림들을 인쇄하여 책으로 묶기도 하였는데 이를 목판인쇄본(block-books)이라고 불렀다. 목판화와 목펀인쇄본들이 곧 일반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착한 사람의 임종>, 1470년경, 목판화. 22.5 X 16.5 cm. <잘 죽는 법>의 삽화, 독일, 울름에서 인쇄

 

이 목판화는 신자들에게 죽음의 시간을 상기시켜주고 또 그 제목이 말하는 바와 같이 신자들에게 '잘 죽는 법'을 가르쳐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목판화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의 임종 장면을 보여 주고 있는데 옆에 서 있는 수도승이 그의 손에 촛불을 건네주고 있다. 천사가  기도하는 작은 사람의 형상으로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의 영혼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배경에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보이는데 죽어가는 사람은 그의 마음을 그쪽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전경에는 아주 추하고 괴상망칙하게 생긴 악마들이 있는데 그들은 '나는 화가 나서 미치겠다'  '우리는 망신을 당했다' '나는 기가 막힌다' '여기에는 아무런 위안도 없다' '우리는 이 영혼을 잃었다'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들의 흉칙한 작태도 헛된 일이다. 잘 죽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지옥의 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유용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목판화는 그림을 인쇄하는 데는  조잡한 방법이었다. 당시의 미술가들은 세부를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과 관찰력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들은 나무 대신 동판(銅版)을 선택했다. 동판화(銅版畵 : copperplate engraving)를 만드는 원리는 나타내고자 하는 선외에는 모두 다 파내야 한다. 이때 뷰린(burin)이라는 특수한 동판용 조각칼을 가지고 동판을 눌러 긁는다. 이렇게 금속판 표면에 새긴 선들 위에  물감이나 인쇄 잉크를 바르면 그 선 속에 그것이 들어가게 되므로 인쇄 잉크를 동판 위에 고루 바르고 난 다음에 동판 표면을 깨끗하게 닦아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한 다음 동판을 종이에 힘껏 누르면 뷰린으로 새긴 선속에 남아있던 잉크가 종이에 묻어 나오게 되므로 판화가 된다. 15세기의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동판화가는 라인 강 상류인 콜마르(Colmar)에 살았던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 : 1453 - 1491)였다.   다음 그림은 숀가우어의 동판화 <거룩한 밤>이다.

 

 

마르틴 숀가우어, <거룩한 밤>, 1470-1473년경, 동판, 25.8 x 17cm ​

 

 

네덜란드의 대가들과 마찬가지로 숀가우어는 그 장면에 있는 모든 작은 일상적인 세부를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그가 표현하는 사물의 재질과 표면을 우리들에게 느끼게 해주려고 노력하였다. 붓이나 물감의 도움없이, 그리고 유화라는 매체를 사용하지 않고 그렇게 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확대경을 통해 그의 동판화를 보면 깨진 돌과 벽돌들, 돌 틈바구니에 핀 꽃, 아치를 타고 기어 올라가는 담쟁이 덩쿨, 동물들의 털과 목동들의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수염 등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알 수 있다. 마구간으로 사용되고 있는 무너진 교회 안으로 성모가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외투자락 위에 조심스럽게 누인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듯이 무릎을  꿇고 있다. 성 요셉은 손에 등불을 들고 아버지 다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다. 황소와 나귀도 그녀와 같이 경배하고 있고 미천한 목동들이 막 현관문을 들어서고 있다.

 

<석공들과 왕>, 1464년경, 장 콜롱브가 채색 장식한 필사본 <트로이 이야기>의 삽화 중 하나, 베를린 국립박물관 동판화관

 

목판술과 동판술은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만테냐와 보티첼리 풍의 동판화가 제작되었고,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는 다른 유파의 동판화들이 제작되었다. 판화는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서로 다른 유파의 미술 개념을 배울 수 있게 해준 또 하나의 새로운 수단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다른 미술가들의 아이디어와 구성을 베껴오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군소 대가들이 그들의 아이디어와 구성을 빌려오는 견본책으로 이용했다. 인쇄술의 발명이 사상의 교환을 재촉하여 종교 개혁이 일어났듯이 그림의 인쇄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승리를 보장해주었다. 그것은 북유럽의 중세 미술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여러 가지 원동력 중의 하나였으며 오직 위대한 거장들 만이 극복할 수 있을 미술의 위기를 이들 나라에 초래하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