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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위기 -16세기 후반의 유럽

서양 미술 이야기 이교수 2023. 12. 15. 08:29

1520년경 이탈리아 도시들의 모든 미술 애호가들은 회화가 완성의 극에 달했다는 사실에 의견의 일치를 본 것 같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등은  그 전 세대가 이룩하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을 실제로 해냈다. 그들에게는 소묘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는 하나도 없었으며, 또 주제상의 어떠한 문제도 그들이 감당하기 벅찰 만큼 복잡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림들은 아름다움과 조화를 올바르게 결합하는 방법을 보여주었고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이 심지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가장 유명한 조각 작품들까지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장차 위대한 미술가가 되고자 하는 소년에게  그 당시의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는 결코 듣기에 기분 좋은 것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당대의 위대한 거장들의 경이적인 작품들에 제아무리 감탄했다 할지라도 미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사실인지에 대해 당연히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어떤 미술 지망생들은 이러한 생각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미켈란젤로가 연구했던 것을 열심히 배우고 최선을 다해서 그의 수법을 모방하려고 했던 것 같다. 미켈란젤로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자세의 나체상을 즐겨 그렸다. 그들은 미켈란젤로의 나체상들을 그대로 베껴서 그것이 그들의 그림에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상관없이 그림속에 집어 넣었다. 그러한 결과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울 때가 많았다. 예를 들면 성경 이야기를 그린 장면에 젊은 운동선수들같은 우람한 체격의 나체 인물들이 가득 등장했다.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의 유행에 휩싸여 단순히 그의 수법(manner)만을 모방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보는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너리즘(Mannerism)시대라고 불렀다. 매너리즘이라는 표현은 틀에 박힌 상식이나 태도에 젖어 그것을 반복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며 매너리즘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시기로 넘어가는 1520년경 부터 1600년 사이를 풍미한 양식을 일컫는다. 이 시기에 전개된 미술이 기존의 방식이나 형식을 답습한 미술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 모두가 어려운 포즈를 취한 나체들만 모아놓으면 그림이 된다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많은 미술가들은 미술이 마침내 정지해버린 것인지, 또는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을 능가하는 것이 정말로 불가능한 것인지, 인체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을 능가하는 것이 정말로 불가능한 것인지, 인체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그들을 능가할 수 없다 하더라도 다른 방면에서도 과연 그러할 것인지 등에 대해 의심해보았다. 터무니 없이 기발한 착상으로 그들을 이겨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상징적인 의미와 해박한 지식으로 가득찬 그림을 그리고자 했는데, 사실 그러한 지식이란 굉장한 학식을 지닌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의 작품은 이집트의 상형문자나 지금은 반쯤 잊혀진 고대 저술들의 의미를 아는 사람 정도나 해독할 수 있는 애매모호한 그림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다.

페데리코 추카리 , < 로마의 추카리 궁의 창문 >, 1592 년

 

또 다른 미술가들은 이전 세대의 위대한 거장들의 작품보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애매하고 덜 단순하거나 조화롭지 못하게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고 하였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주장 했던 것 같다. 즉 거장들의 작품은 완벽하다. 그러나 완벽한 것이 영원히 흥미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거기에 익숙해지면 그러한 작품은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 놀랍고 기발하고,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그런 것을 추구하려고 한다. 물론 고전적인 거장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능가하려는 이 젊은 미술가들의 강박 관념에는 어딘지 건전치 못한데가 있었다.  이것은 심지어 그 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까지도 괴상하고 기교에 치우친 쓸데없이 복잡한 실험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선배들을 능가하려는 이들의 미친듯한 노력 그 자체가 그들의 과거의 거장들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이기도 했다. 

안드레아 팔라디오, <바첸차 부근의 빌라 토론다>, 1550년, 이탈리아 16세기 별장

 

레오나르도도 자신을 가리켜 '스승을 능가하지 못한 불쌍한 제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위대한 '고전적인' 거장들 자신도  어느 정도는 이 새롭고 생소한 실험을 시작했고 또 고무되기도 하였다. 바로 그들의 명성과 그들이 만년에 누린 명예가 그들로 하여금 구도나 채색에 있어서 새롭고 비정통적인 효과를 시험해봄으로써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게 만들었다. 특히 미켈란젤로는 모든 관례를 대담하게 무시할 때가 많았다. 다른 분야에서보다도 특히 건축에 있어서 그는 고전적인 전통의 신성 불가침한 규칙들을 버리고 그 자신의  기분과 변덕에 따를 때가 많았다.  대중으로 하여금 한 예술가의 '기발한 착상'과 '창안'을  찬양하는 데 익숙하게 만든 것도 미켈란젤로였으며 자신의 초기 걸작의 비할 데 없는 완벽성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쉬지 않고 표현의 새로운 수법과 양상을 탐구하는 천재의 본보기를 보여준 것도 바로 미켈란젤로였다.

 

이러한 대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젊은 미술가들이 그들의 '독창적인' 창안을 가지고 대중을 놀라게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다소 재미있는 디자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건축가이자 화가인 페데리코 추카리(Federico Zuccari : 1543 - 1609)가 설계한 얼굴 모양의 창문은 이러한 기발한 창안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미술가는 피렌체의 조각가이자 금세공사인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 1500 - 1571)였다. 첼리니는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유명한 자서전에서  그 시대의 생활상에 관한 매우 다채롭고 생생한 자료들을 남겨주었다. 그는 거만하고 잔인하며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마치 뒤마의 소설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재미있게 그의 모험담을 들려주기 때문에 그에게 화를 낼 수가 없다.

 

허영심과 자만, 그리고 안절부절 못하는 성격으로 인해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한 궁전에서 다른 궁전으로 이동해다니면서 싸움도 하고 명성을 얻기도 한 첼리니는 정말로 그 시대가 낳은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어 미술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존경받고 젊잖은 공방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나 추기경들이 다투어서 그의 호의를 구하고자 하는 미술의 '대가'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몇 안되는 그의 작품 중에 1543년에 프랑스의 왕을 위해 만든 금제 소금 그릇이 있다.  첼레니는 이 작품에 관해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벤베누토 첼리니 , < 소금 그릇 >, 1543 년 ,&nbsp; 흑단 ( 黑檀 )&nbsp; 바탕 위에 금과 칠보 세공 ,&nbsp; 길이&nbsp; 33.5cm,&nbsp; 빈 미술사 박물관

 

땅과 바다가 서로 침투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두 인물상의 다리가 서로 맞물리게 했으며 "남자로 표현된 해신(海神)은 소금을 충분히 담을 수 있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배를 잡고 있으며, 그 밑에 네 마리의 해마를 배치하고 그에게 삼지창을 쥐어주었다. 아름다운 여인으로 표현한 대지의 여신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만들었으며 그 옆에 후춧가루를 담을 수 있는 풍부한 장식의 신전을 놓았다." 첼리니의 태도는 그전 세대가 했던 것보다 더 흥미있고 비범한 것을 만들려는 당대의 불안정하고 열광적인 노력들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1534-40년 미완성, 파르미자니노의 작품, 성모상 <긴 목의 마돈나>, 백조같은 성모의 목

 

우리는 이와 동일한 정신을 코레조의 제자였던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n : 1503 - 1540)의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성모상이 성경에 나오는 주제를 가식과 지나친 기교로 처리하였기 때문에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는 라파엘로가 이 테마를 다루었을 때 보여준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이 전혀 없다. 이 작품은 일명 <긴 목의 마돈나>라고도 불리는데  그 까닭은 이 화가가 성모를 자기 나름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나머지 성모의 목을 마치 백조의 목처럼 길쭉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그는 인체의 비례를 기묘한 방식으로 길게 늘여놓았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을 가진 성모의 손, 전경에 있는 천사의 긴 다리, 초췌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펼쳐보고 있는 비쩍 마른 예언가 등은 마치 일그러진 거울에 비친 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미술가가 무지하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은 아니다. 파르미자니는 자기가 이처럼 비 정상적으로 길게 늘여진 형태를 좋아한다는 것을 열심히 보여주려고 했다. 이러한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이 그림의 배경에 인체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비례를 가진 괴상한 모양의 높은 원주를 세워놓았다. 그는 인물들을 성모의 양쪽에 균등하게 배치하는 대신 붐비는 천사들을 비좁은 왼쪽 구석에 몰아 넣고, 오른 쪽은 넓게 터 놓아 키가 큰 예언자의 모습 전신을 보여주고 있는데 거리 때문에 상대적으로 크기가 너무 작아져서 그 키가 성모의 무릎에도 채 못미치고 있다. 이 화가는 정통적인 수법을 피하고 싶어했다.

 

그는 완벽한 조화에 관한 고전적인 해결 방식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

자연스러운 단순함은 아름다움을 이룩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만 안목 높은 미술 애호가들의 흥미를 끄는 데는 여러 가지 간접적인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선배 거장들이 이룩해 놓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희생하면서까지 무엇인가 새롭고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을 창조하고자 모색했던 파르미나니노를 비롯한 그 당시의 모든 미술가들은 아마도 최초의 '현대적인' 미술가들이었을 것이다. 

 

전시대 거인들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는 이 기묘한 시대의 기타 다른 미술가들은 선배들을 능가하려고 그처럼 절망적으로 노력하지 않았으며 평범한 수준의 기량과 솜씨에 만족했다. 그들의 노력 가운데 몇몇 가지는  충분히 놀랄만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전형적인 예는 이탈리아 이름으로는 조반니 다 볼로냐(Giovanni da Bologna) 혹은 쟘볼로냐(Giambologna)라고 알려진 플랑드르의 조각가 장 드 불로뉴(Jean de Boulogne : 1529 - 1608)가 제작한 신(神)들의 사자(使者) <머큐리 상>이다. 그는 여기서 불가능 한 것을  성취하고자 하였다. 즉 생명이 없는 물체의 무게를 극복하고 공중을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조각상을 창조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어느 정도까지 성공했다. 그의 유명한 <머큐리상>은 발 끝으로만 땅을 디디고 있다. 아니 사실은 땅이라기보다 남풍(南風)을 상징하는 가면의 입에서 분출되는 바람을 디디고 있다. 

쟘볼로냐, <머큐리 상>, 1580년. 청동. 높이 187cm.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 박물관

 

이 조각상은 아주 교묘하게 균형이 잡혀 있기 때문에 실제로 공중에 떠서 빠르고 유연하게 날아가는 것같이 보인다. 고전기의 조각가라면, 심지어 미켈란젤로까지도 그러한 효과는 본래의 무거운 재료 덩어리를 생각나게끔 하는 조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잠볼로냐는 파르미자니노 못지 않게 이러한 기존의 규칙에 도전해서 아주 놀라운 효과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보여주려고 했다.

틴토레토 <성 마르코의&nbsp; 유해 밝견> 1562년경, 캔버스에 유채, 405 X 405 cm.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16세기 후반의 미술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베네치아 출신의 야코포 로부스티 <Jacopo Robusti : 1518 - 1594, 통칭 틴토레토(Tintoretto)>였다. 그도 역시 티차아노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형태와 색채에 있어서의 단순한 아름다움에 진력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불만은 예외적인 것을 만들어내려는 단순한 욕망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티치아노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화가로서는 비할 데 없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그림들은 감동적이기 보다는 쾌감을 주는 경향이 더 많다고 느꼈던 것 같다. 즉 티치아노의 작품은 성경의 이야기와 성자들의 전설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할 만큼 열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 옳았던 틀렸던 간에 그는 이 성경의 이야기들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그린 사건의 긴장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자 결심했음이 분명하다. 아래 그림은 그가 그의 그림을 비범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얼핏보면 이 그림은 혼란스럽고 번잡하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보게되는 것은 라파엘로의 작품에서처럼 화면위에 질서있게 배치된 인물상들이 아니라 이상하게 뚫려있는 궁륭이다. 왼쪽 구석에는 후광이 빛나는 키가 큰 사람이 서 있는데, 그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멈추게 하려는 듯이 팔을 쳐들고 있다.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면 오른쪽의 궁륭 천장 바로 아래에서 막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묘소에서 시신을 내려놓으려 하고 있다. 그들은 관의 뚜껑을 열었고 터번을 쓴 또 한 사람이 그들을 돕고 있다. 뒤에 서 있는 귀족은 횃불을 들고 다른 묘소의 비명(碑銘)을 읽으려 하고 있다. 이들은 분명히 지하 묘굴을 파헤치고 있는 중이다. 시체 하나가 양탄자 위에 널브러져 누워있는데, 그 모습이 괴이한 단축법으로 그려져 있다. 그 옆에 화려한 옷을 입은 한 노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시체를 들여다 보고 있다.

 

오른쪽 구석에는 놀란 표정으로 성인(聖人) -후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틀림없이 성인일 것이다.- 을 보면서 커다란 몸짓을 하고 있는 남녀 한 무리가 있다. 좀더 자세히 들요다 보면 그가 책을 한 권 들고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인 복음서 저자 성 마르코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이 그림은  성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이교도인 이슬람교도들의 도시인)에서 베네치아로 옮겨왔던 이야기 중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베네치아에는 그 유해를 안치하기 위하여  성 마르코 대성당에 유명한 감실이 건립되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성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주교를 역임하다가 죽어서 그곳의 지하 묘굴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베네치아 사람이 이 성인의 유해를 찾는 경건한 부름을 받고 지하 묘굴을 헤치고 들어가보니 어떤 묘석에 성인의 귀중한 유해가 묻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우연히 바로 그 유해를 꺼내 놓았을 때 성 마르코가 갑자기 나타나서 지상에 현존하는 그의 유해를 알려주었다. 틴토레토는 바로 그 순간을 선택했다. 성인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묘굴을 뒤지지 말라고 명한다. 성인의 유해는 이미 발견된 것이다. 그것은 성인의 발치에서 온몸에 빛을 발하며 누워있고 벌써 그 시신의 존재가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 오른쪽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남자는 그를 사로잡고 있던 악마로부터 해방되어 악마가 그의 입에서 한 줌 연기로 변해 도망치고 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꿇어 앉아서 경배들 하고 있는 귀족은 이 그림을 주문했던 헌납자로서 그는 종교 단체의 일원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빛과 어둠, 원경(원경)과 근경(근경) 및 조화가  결여된 몸짓과 동작을 보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틴토레토가 보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우리들 앞에 전개되고 있는 이 엄청난 기적의 인상을 창조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곧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틴토레토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조르조네와 티치아노 같은 베네치아 화가들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었던 원숙한 색채의 아름다움까지 희생해야만 했다.

 

틴토레토 , <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 >, 1555-8 년경, 캔버스에 유채 , 157.5 X 100.3cm, 런던 국립미술관

 

위 그림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는 음산한 빛과 불안정한 색조가 어떻게 긴장감과 흥분된 감정을 고무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이 극적인 사건이 절정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공주는 마치 그림 속에서 곧바로 우리들을 향해 달려 나올 것만 같다. 한편 주인공인 성 게오르기우스는 일반적인 규칙과는 정반대로 주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배경 속에 멀리 들어가 있다. 그 당시 베네치아의 위대한 비평가이자 전기 작가(傳記作家)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 1511 - 1574)는 틴토레토를 이렇게 평가했다. "만약 그가 정통적인 방법을 버리지 않고 선배들의 아름다운 양식을 따랐다면 베네치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바사리는 용의주도하지 못한 제작 방법과 괴상한 취향이  그의 작품을 망쳐 놓았다고 생각했다. 바사리는 틴토레토가 그의 작품에 '마무리 손질'을 하지 않은 데 대해 이상하게 생각했다. 또 "그의 스케치는 아주 거칠어서 그의 연필  획선은 정확한 묘사보다는 힘을 보여주며 또 우연하게 그려진 것같이 보인다."

라고 했다.

 

그러한 비난은 그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대의 미술가들을 공격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의 위대한 혁신자들은 본질적인 것에만 집중을 하고 통상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기법적인 완성도에 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틴토레토와 같은 시대에는 기법적인 탁월함이  아주 높은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약간의 기계적인 소질만 있으면 누구나 그 기법상의 트릭에 숙달될 수 있었다. 틴토레토와 같은 사람은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 했으며 또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데 있어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그의 그림이 전설적인 장면에 대해서 그가 상상한 바를 전달하기만 하면 그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매끈하고 세심한 마무리 손질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무리 손질을 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었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았던 것이다.

 

16세기의 화가들 중에서 틴토레토의 화법을 한층 더 밀고 나간 사람은 그리스의 크레타 섬 출신의 화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cos Theotocopoulos : 1541 - 1614)로 그는 간략하게 '그리스인'이라는 의미의 엘 그레코(El Greco)로 불렸다. 그는 중세 이래로 새로운 미술이라고는 전혀 발전시키지 못한 세상의 고립된 지역에서 베네치아로 건너왔다. 그는 그의 고향에서 고대 비잔틴, 말하자면 실제와 비슷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엄숙하고 딱딱한 양식으로 그려진 성상들을 익히 보아왔을 것이다. 그림을  볼 때 그 묘사가 정확한지 가려내는 훈련을 받지 못한 그는 틴토레토의 예술에서 별다른 충격을 받지 못한 그는 틴토레토의 예술에서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고 매혹적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도 또한 틴토레토와 마찬가지로 격정적이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도 성경의 이야기들을 새롭고 감동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한동안 베네치아에 머물렀던 그는 그 후 유럽의 외진 곳인 스페인의 톨레도(Toledo)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연스럽고 정확한 묘사를 요구하는 비평가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며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는 아직도 미술에 관한 증세의 이념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자연적인 형태와 색채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감동적이고 극적인 환상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엘 그레코가 틴토레토를 능가하게 만든 이유를 설명해준다. 아래 그림은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놀랍고 흥미진진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이 그림은 요한 계시록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한 구석에서 환상적인 황홀경에 빠져서 하늘을 쳐다보며 예언자의 몸짓으로 두 팔을  올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성 요한이다.

엘 그레코 , < 요한 묵시록의 다섯번째 봉인의 개봉 >, 1608-14 년경 ,&nbsp; 캔버스에 유채 , 224.5 X 192.8cm,&nbsp;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다음은 요한 계시록에서 어린 양이 성 요한을 불러 일곱 개의 봉인(封印)을 떼는 것을 '와서 보라'는 대목 중의 한 부분(6장 9 - 11절)이다.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떼셨을 때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리고 그 말씀을 증언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큰 소리로 "거룩하시고 진실하신 대왕님,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땅 위에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또 우리가 흘린 피의 원수를 갚아주시겠습니까? " 하고 부르짖었다. 또 그들은 흰 두루마기 한 벌씩을 받았다.]

흥분된 몸짓을 하고 있는 나체의 인물들은 하늘에서 내린 선물인 흰 두루마기를 받기 위해서 무덤에서 일어난 순교자들이다. 제아무리 정확하고 빈틈없는 소묘력을 가진 화가라 할지라도 성인들이 이 세상의 파괴를 요구하는 최후의 심판날의 그 무서운 광경을 이처럼 무시무시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틴토레토의 한쪽으로 치우친 비정통적인 구성 방법에서 엘 그레코는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고 또 파르미자니노의 기교를 부린 <긴 목의 마돈나>에서와 같이 인물을 길쭉하게 그리는 매너리즘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엘 그레코가 이 미술 방법을 새로운 목적에 사용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신비스런  종교적 열정의 나라 스페인에서 살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매너리즘의 지나치게 기교를 부린 미술은 엘 그레코의 손을 거쳐 감식가(鑑識家)를 위한 미술로서의 특징을  대부분 상실하게 된다. 그의 가장 위대한 초상화들은 티치아노의 초상화에 비견될 수 있다.

 

북쪽의  독일, 네덜란드, 영국과 같은 나라의 미술가들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미술가들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남유럽의 미술가들은 새롭고 놀라운 수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제와 씨름하기만 하면 되었다.그러나 북유럽에서는 회화가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심각한 문제와 부딪치고 있었다. 이 커다란 위기는 종교 개혁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많은 신교 교도들은 교회 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 숭배로 간주했다. 그래서 신교 지역에 사는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 즉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칼빈 교도들 중 강경파들은 심지어 집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도 일종의 사치라고 반대했다. 이런 것이 교리상 허용된 지역에서도 일반적으로 기후와 건물의 양식이 이탈리아 귀족들이 그들의 궁전에 그리게 했던 그런 대규모의프레스코 화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화가들의 정상적인 수입원으로 남게 된 것은 책의 삽화나 초상화 정도였다. 과연 그것만으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의 영향을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독일 화가인 한스 홀바인(아들)의 생애에서 볼 수 있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 1497 - 1543)은 뒤러 보다는 스물여섯 살 아래이고 첼리니 보다는 불과 세 살 위였다. 그는 이탈리아와  긴밀한 교역 관계에 있었던 부유한 상업도시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태어나 곧 새로운 학문의 중심지였던 바젤(Basle)로 갔다. 이렇게 해서  홀바인은 뒤러가 평생동안 그처럼 정열적으로 추구했던 지식을 좀 더 손쉽게 습득했다. 홀바인은 화가 집안(아버지도 유명한 화가였다) 출신인 데다가 매우 재빠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얼마 안가서 북유럽과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업적을 모두 다 섭렵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서른 살쯤 되었을 때 바젤의 시장(市長) 이름으로 봉헌된 제단화 <성모상>을 그렸다. 이 그림의 형식은 모든 나라에서 전통적인 것으로서, 우리는 이미 <월튼 두폭화>나 티치아노의 <페사로의 성모>에 적용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홀바인의 그림은 이러한 종류의 그림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 ( 小 ) 한스 홀바인 , < 성모와 마이어 시장 일가 >, 1528년경, 제단화, 목판에 유채, 146.5 X 102cm, 다름슈타트 성 ( 城 ) 미술관.

 

고전적 형태의 감실(龕室)에 둘러싸인 고요하고 품위있는 성모 양쪽에 헌납자의 가족들을 별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배치해 놓은 방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조반니 벨리니와 라파엘로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조화로운 구성을 상기시켜 준다. 세부 묘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인습적인 아름다움을 다소 무시하는 것으로 보아, 홀바인은 북유럽에서 화가 수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어 사용권 나라에서 정상을 향한 길을 다지던 그는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 부딪혀 이러한 모든 희망을 잃게되었다. 그는 1526년에 위대한 학자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의 추천서를 받아서 스위스를 떠나 영국으로 갔다. "여기서는 예술이 얼어 죽어가고 있소." 이것은 토마스 모어 경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에게  이 화가를 추천한 글에서 에라스무스가 한 말이다.  영국에 도착한 후 홀바인이 처음 한 작업은 또 다른 위대한 학자인 토마스 모어 경의 집안 식구들을 담은 대형 초상화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을 위한 부분적인 습작 몇 점은 아직도 윈저 궁에 보존되어 있다. 그는 헨리 8세로부터 궁정화가라는 공식 직함을 받게 되자 드디어 자기가 몸담고 일할 수 있는 활동의 범위를 찾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성모 상을 그릴 수 없게 되었으나 궁정화가의 일은 매우 다양했다. 그는 보석과 가구, 연극의상, 그리고 실내 장식 뿐만 아니라 무기나 술잔까지 디자인했다. 그러나 그의 주된 임무는 왕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헨리 8세 시대의 남자와 여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홀바인의 끝없는 통찰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은 헨리 8세의 신하로 수도원의 해체에 참가했던 관리 리처드 사우스웰 경의 초상화이다. 홀바인의 이런 초상화들에는 드라마틱한 것은 하나도 없고 사람의 눈을 끌만한 것도 없으나 이 그림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모델의 마음과 인품이 드러나보이는 것 같다. 홀바인이 그 인물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나 호의 없이 본대로 충실하게 그린 것이라는 점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홀바인이 이 인물을 이 그림에서 배치한 방법을 보면 우리는 거장의 빈틈없는 솜씨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체 구성이  아주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알기 쉽게'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홀바인이 의도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초기의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배경, 즉 평소에 그 인물이 가까이 했던 것들을 통해서 주인공의 특성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며 세부를 묘사하는 그의 탁월한 솜씨를 여전히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고 기법이 완숙해감에 따라서 그러한 트릭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도 않았으며 또 초상 인물로부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게 의도하지도 않았다. 홀바인이 떠나자 독일어권의 회화는 놀라울 정도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가 죽자 영국의 미숲도 그와 비슷한 꼴이 되었다.  사실상 영국의 회화 중에서 종교 개혁의 회오리를 견디어낸 유일한 분야는 홀바인이 그처럼 확고하게  다져놓은 초상화 뿐이었다.

 

 

유럽의 신교 국가 중 종교 개혁이 불러 일으킨 위기를 무사하게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네덜란드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회화가 번창했으며 미술가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곤경에서 빠져나갈 길을 발견했다. 그들은 초상화에만 매달리지 않고 신교 교회들이 반대하지 않을 주제를 찾아 그러한 모든 유형을 전문화하였다. 일찌기 반 에이크의 시대로부터 네덜란드의 미술가들은 자연을 모방하는 데 완벽한 대가들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움직이는 아름다운 인체의 표현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필적할만한 사람이 없다고 자랑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꽃, 나무, 마굿간, 양떼 같은 것을 그릴 때 필요한 절대적인 인내력과 정확성에 있어서는 '플랑드르(Flanders) 화가들이 쉽게 그들을 앞지를 수 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따라서 더 이상 제단화나 기타 다른 종교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게된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그들의 공인된 전문적 특기를 사줄 수 있는 시장(市場)을 발견하려고 애썼고, 사물의 외관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솜씨를 과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풍속화가는 피터 브뢰헬(Pieter Bruegel : 1525 - 1569) 이었다. 그도 당대의 많은 북유럽 화가들처럼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안트웨르펜과 브뤼셀에서 살면서 작업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브뢰헬이 즐겨 그렸던 그림의 '종류'는 농민들의 생활 장면이었다. 그는 농부들이 떠들썩하게 술잔치나 축제를 벌이고 일하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플랑드르의 농부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도시 사람이었고  농촌의 순박한 생활에 대한 그의 태도는 영국의 쉐익스피어와 매우 비슷한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시골뜨기를 우스갯거리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 풍조였다. 그러나 브뢰헬이 속물 근성에서 이러한 관행을 받아들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소박한 시골 생활은 인간 본성의 자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인위적이고 인습적인 허식에 가려지지 않는다.

 

브뢰헬이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시골의 결혼식을 다룬 유명한  작품이 있다. 대부분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도 도판으로는 그 진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즉 모든 세부가 더 더욱 작게 축소되기 때문에 이중으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잔치는 배경에 짚을 높이 쌓아올린 헛간에서 벌어지고 있다. 신부는 푸른 휘장 앞에 앉아있고 그녀의 머리위에는 일종의 관 같은 것이 걸려 있다. 그녀는 두손을 모으고 좀 모자란 듯이 보이는 얼굴에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조용히 앉아 있다. 

피터 브뢰헬(夫), < 시골의 결혼 잔치> 1568년경, 목판에 유채, 114 X 164 cm. 빈 미술사 박물관.

 

의자에 앉아있는 노인과 그 옆에 있는 부인은 아마도 신부의 부모인 것 같다. 그보다 뒤쪽에 앉아서  숟가락으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남자가 아마 신랑일 것이다. 식탁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데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잔치가 막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왼쪽 구석에는 맥주를 따르고 있는 남자가 있고 바구니 속에는 아직 빈 조끼(jug)들이 많이 남아 있다. 흰 앞치마를 두른 두 남자가 들것 같은 것에 열 그릇이 넘는 파이 혹은 죽으로 보이는 것을 나르고 있다. 손님 중의 한 사람이 그것을 식탁 위로 옮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밖에도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배경에는 들어오려고 애를 쓰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고 악사들고 있다. 악사 중의 한 사람은 서글프고 허기진 눈빛으로 운반되어 들어오는 음식을 바라다보고 있다. 식탁 한 구석에는 수도사와 촌장이 앉아 그들만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다. 그들은 이 잔치에서는 어딘가 아웃사이더와 같은 존재이다. 

 

전경에는 접시를 든 채 커다란 모자를 덮어쓴 아이가 하나 앉아 있는데 음식을 핥아먹느라고 정신이 없다. 꾸밈없는 탐식(貪食)의 정경이다. 그러나 넘치는 기지와 뛰어난 관찰력으로 묘사된 이처럼 많은 일화들보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브뢰헬이 비좁다거나 번잡스러운 인상이 전혀 들지 않게 그림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틴토레토라 할지라도 이렇게 수많은 인물들이 가득 들어찬 공간을 브뢰헬만큼 교묘한 수단으로 더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식탁은 원근법에 의해서 뒤로 후퇴하고 있고, 인물들의 움직임은 배경에 있는 헛간 입구의 군중들로부터 시작해서 전경의 음식을 나르는 두 사람을 거쳐 음식을 받아 상 위에 올려놓는 사람을 통해서 다시 배경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바로 이 음식을 옮겨놓은 사람 떼문에 우리의 시선은 곧장 조그맣게 그려졌지만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흐뭇한 표정의 신부에게로 향하게 된다. 이 유퀘한, 그러나 결코 단순하다고 할 수 없는 그림들에서 브뢰헬은 풍속화라는 미술의 새로운 왕국을 발견했다.  그 이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 왕국을 더 완벽하게 개척해나갔다.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미술의 위기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탈리아와 북유럽 나라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는 양쪽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프랑스 중세 미술의 굳건한 전통이 처음에는 이탈리아 미술의 유입으로 위협을 받았다. 프랑스 화가들은 네덜란드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미술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프랑스의 상류 계급이 마침내 받아들인 이탈리아 양식은 첼리니 유형의 세련되고 우아한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이었다. 이탈리아 미술의 이러한 영향을 우리는 프랑스 조각가 장 구종(Jean Goujon : 1566 사망 ?)이 만든 분수의 부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 구종 , < 님프 >,< 순진무구힌 자들의 샘 > 의 부분 , 1547-9 년, 대리석, 각각 240 X 63cm, 파리 국립 기념품 박물관

 

이들 흠 잡을 데 없이 우아한 인물상들과 좁고 긴 면적에 인물들을 적절하게 짜맞추어 넣는 방법에서 우리는 파르미자니노의 까다로운 우아함과 잠볼로냐의 절묘한 기교를 함게 엿볼 수 있다. 

 

구종보다 한 세대 뒤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들의 기발한 발상을 피터 브뢰헬의 정신으로 동판화에 표현한  로랭 출신의 화가 자크 칼로(Jacques Callot : 1592 - 1635)가 등장했다. 틴토레토, 더 나아가 엘 그레코와 같이 그는  키가크고 비쩍 마른 인물들과 넓고 예기치 않은 광경을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결합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수법을 구사하여 브뢰헬처럼 부랑자, 군인, 병신, 거지, 떠돌이 악사들의 생활 정경을 통해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표현하려고 했다.

자크 칼로 , < 두 이탈리아 광대 >, 1622 년경 ,&nbsp; 동판화 연작&nbsp; < 스페사니아의 춤 > 의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