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하는 시각(視覺)세계 : 17세기 전반기 :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미술의 역사는 흔히 다양한 양식들의 역사, 즉 여러 양식들이 계승되고 발전되어지는 이야기로 설명될 때가 많다. 우리는 원형 아치를 기본으로 하는 12세기의 로마네스크 또는 노르만 양식이 어떻게 첨형 아치의 고딕 양식으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고딕 양식을 대신하여 들어선 르네상스 양식이 어떻게 15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점차 유럽의 모든 나라에 그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르네상스를 뒤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Baroque)라고 부른다. 그 이전의 양식들은 각각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식별하기가 용이하였으나 바로크의 경우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 이유는 르네상스 이후로 거의 오늘날까지도 건축가들은 원주, 벽기둥, 코니스, 엔타블레이처, 쇠시리 장식 등과 같은 동일한 기본 형태들을 사용해왔는데, 이것들은 모두 본래 고전 시대의 유적에서 빌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르네상스의 건축 양식이 브루넬네스키의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건축에 관한 많은 책들은 이 기간 전체를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건축에 대한 취향과 유행은 그 오랜 기간 동안에 당연히 많은 변화를 거쳐왔으므로 이 변화하는 양식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각 양식마다 개별적인 명칭을 붙이는 것이 편리하다. 오늘날 이러한 양식들을 가리키는 어휘들 대부분이 그것이 처음 쓰여진 당시에는 낮추어 평가하거나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되던 단어였다는 사실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고딕'이라는 단어도 처음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미술 비평가들이 야만적으로 생각하는 양식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으로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로마의 도시들을 약탈했던 고트족이 이 양식을 이탈리아에 도입했다고 생각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매너리즘'이라는 단어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17세기 비평가들이 16세기 말의 미술가들을 비난하는 데 사용했던 가식과 천박한 모방이라는 본래의 의미로 남아있다.
바로크라는 말도 17세기의 예술 경향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던 후대의 비평가들이 그것을 조롱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었다. 바로크라는 말은 사실은 터무니 없다든가 기괴하다는 의미로,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채택한 방법 이외의 다른 식으로 고전 건축의 형식을 차용하거나 채택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단어였다. 이러한 비평가들에게는 고대 건축의 엄격한 규칙을 무시하는 것이 통탄할만한 취향의 타락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양식을 바로크라고 불렀다. 이러한 구별을 평가하는 것은 우리들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도시에서 고전 건축의 규칙을 무시하거나 완전히 오해한 건물들을 너무나 익숙하게 보아왔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서는 무감각하게 되었고 또 옛 논쟁들도 우리들이 현재 관심갖고 있는 건축적인 문제와는 대단히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1)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 : 1541 - 1602)
우리에게는 아래 그림에 나오는 교회의 정면이 대단히 흥미있는 건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올바르게 모방했든 아니든 간에 이런 종류의 건물을 모방한 것들을 수없이 보아왔으므로 전혀 신기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건물이 로마에 처음 세워졌던 1575년 당시에는 대단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 교회당의 건립은 당시 수많은 교회가 있었던 로마에 단지 숫자 하나를 더 보태는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 전역에 걸친 종교 개혁에 대항해서 싸우려는 드높은 기대를 걸고 새로 설립된 예수회(Jesuits) 교단의 교회였다. 교회의 형태 자체가 새롭고 흔히 볼 수 없는 설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르네상스 방식인 원형의 대칭적 설계는 신에게 봉사하는 데 부적합하다고 외면당하여 새롭고 단순하고 독창적인 설계가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이 새로운 교회의 형태는 높고 위풍당당한 원개(圓蓋)를 지닌 십자형이어야 했다. 신랑(身廊)인 커다란 장방형의 공간에서는 신도들이 지장없이 한데 모일 수 있었고 주제단(主祭壇)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주제단은 이 장방형 공간의 제일 끝에 있었으며 그 뒤에는 초기 바실리카의 후진(後陳)과 비슷한 형태의 후진이 있었다.
개인적인 기도와 개별적인 성인들에 대한 기도를 위해서 신랑의 양편에는 작은 예배당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각 예배실은 독자적인 제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십자형의 양팔에 해당되는 양끝 부분에는 두개의 큰 예배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것은 간결하고 독창적인 교회 설계 방식으로 그 이래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이것은 주제단을 강조하는 장방형의 형태로 이루어진 중세 교회당의 주된 특징과 장엄한 궁륭을 통해서 빛이 흘러 들어오는 크고 널찍한 내부를 매우 강조하는 르네상스 식 설계 방식을 결합한 것이다.
유명한 건축가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가 설계한 <일 제수(Il Gesu)교회>의 정면 현관을 자세히 살펴보면 왜 그 정면이 내부 못지않게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새롭고 독창적인 인상을 주었을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즉각 이 건물이 고전기 건축의 여러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원주(오히려 반원주나 벽 기둥에 가깝다)가 아키트레이브를 받치고 있고 그 위로 높은 '아티카(attica)'가 있으며 이번에 이것은 또 위층을 지탱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의 배치 방법까지도 고전 건축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즉 원주가 틀을 이루고 양쪽에 작은 현관을 거느리고 있는 중앙의 대현관은 마치 음악가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주요 화음처럼 건축가의 마음 속에 굳게 뿌리를 박고 있는 고대 로마의 개선문 형식을 상기시켜준다.
이 단순하고 장엄한 정면에는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고전적인 건축법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려 한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고전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융합시킨 방법을 보면 로마나 그리스, 심지어 르네상스 건축법까지도 도외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정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마치 전체 구조를 보다 호화스럽고 다채롭고 또한 장엄하게 보이게 하려는 듯 기둥이나 반기둥이 모두 이중(二重)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눈에 띄는 두번째 특징은 이 건축가가 단조로운 중복을 피하고 이중 틀에 의해서 강조된 대현관이 있는 중심부에 초점을 주기 위해 각 부분들을 세심하게 배치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이와 비슷한 요소들로 구성된 그 이전의 건물들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이내 전체적인 특성에 있어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요소들로 구성된 그 이전의 건물들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이내 전체적인 특성에 있어 큰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건물과 비교해보면 브루넬레스키의 <파치 성당>은 놀라울 만큼 단순한 가운데 경쾌하고 우아해 보인다. 심지어 산소미노의 <산 마르코 대성당의 도서관>과 같은 화려하고 복잡한 건물도 이것과 비교하면 단순하게 보이는데 그 까닭은 거기에는 동일한 기본 형태가 변화없이 반복되어 있기 때문이다. 델라 포르타가 설계한 최초의 예수회 교회당의 정면에는 모든 부분이 전체적인 효과를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커다랗고 복잡한 형태 속에 융합되어 있다.아마도 이런 점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이 건축가가 아래층과 위층을 조화있게 연결시키려고 무척 세심한 배려를 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고전 시대의 건축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일종의 소용돌이 형태를 사용했다. 우리는 그리스의 신전이나 로마의 원형 극장 어딘가에 이런 종류의 형태가 있다고 상상만 해보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사실상 순수한 고전적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크 건축가들에게 퍼부었던 비난의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곡선과 소용돌이 무늬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 '변칙적'인 장식물들을 종이로 살짝 가려놓고 그것들이 없는 상태를 그려본다면 이것들이 단순한 장식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장식이 없다면 건물은 '산산조각으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소용돌이 형태는 건물 전체에 건축가가 의도했던 그런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바로크 건축가들은 대규모의 전체 형태에 결코 없어서는 안될 본질적인 통일성을 주기 위해서 보다 더 대담하고 기발한 창안을 동원해야 했다. 이러한 창안들은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나 훌륭한 건물을 지으려는 건축가의 의도를 달성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것이었다.
매너리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회화가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의 양식보다 더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은 여러 모로 바로크 건축의 발달사와 비슷했다. 우리는 틴토레토와 엘 그레코의 위대한 작품들 속에서 17세기회화에서 점점 더 많은 중요성을 띠게 되는새로운 이념들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를태면 빛과 색의 강조라던지 단순한 균형을 무시하고 보다 복잡한 구도를 선호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의 회화는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을 단순하게 지속시킨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미술이 매우 위험한 상투적인 방식에 빠졌으며 거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미술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즐겨했다. 특히 로마에는 그 당시의 미술가들 사이의 다양한 동향(動向)이나 '운동'들에 관해 토론하고, 그들을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과 비교하며 미술가들 사이의 다툼이나음모에 가담하여 어느 한쪽을 편들기를 즐겨하는 교양있는 신사들이 많았다.
그러한 논쟁 자체는 미술의 세계에서 처음있는 현상이었다. 16세기에는 회화가 조각보다 나은 예술이냐, 또는 구도가 색채보다 더 중요하냐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식의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예컨대 피렌체 사람들은 구도를 중시했고 베네치아 사람들은 색채를 더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주된 쟁점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로마로 와서 아주 정반대의 수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두 사람의 화가들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한 사람은 볼로냐 출신의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밀라노 근처의 작은 마을 출신의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 1573 - 1610)였다. 이들은 둘 다 매녀리즘에 진력이 났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매너리즘의 기교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대단히 달랐다. 안니발레 카라치는 베네치아 파(派), 특히 코레조 파의 미술을 배운 화가 집안의 일원이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대단히 존경했던 라파엘로의 작품 세계에 매료되었다. 그는 매너리즘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거부했던 라파엘로의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했다.
2)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 1560 - 1609)
후대의 비평가들은 그가 과거의 모든 거장들이 가지고 있던 장점만을 골라서 모방하려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이런 종류의 계획(즉 '절충적' 계획)을 세웠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계획은 사실 뒤에 그의 작품을 모델로 삼았던 아카데미나 미술 학교에서 이루어졌다. 카라치 자신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할 만큼 졸렬한 화가가 아니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훌륭한 화가였다. 그러나 당시 그가 속해있던 로마의 집단이 부르짖은 구호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양성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그의 의도를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보며 슬퍼하는 성모를 묘사한 제단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뤼네발트가 그린 고통으로 심하게 일그러진 예수와 비교해보면 안니발레 카라치는 보는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와 아픔의 고통을 상기시키지 않으려고 아주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 자체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의 그림처럼 구도가 단순하고 조화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을 르네상스 회화라고 착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구세주의 몸 위에서 아른거리는 빛의 묘사 방식이 라든가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는 표현방식은 르네상스의 양식과는 아주 다른, 말하자면 바로크적이다. 이러한 작품은 감상적(感傷的)이라고 치부해버리기는 쉬우나 우리는 이 그림이 그려진 본래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이 그 앞에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조용히 바라보며 묵상하도록 만들어진 제단화인 것이다.
우리가 카라치의 수법을 어떻게 생각하던지 간에 카라바조와 그의 일파들은 그의 회화 방식을 높게 평가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두 화가는 참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물론 이러한 우정은 걸핏하면 쉽게 화를 내고 사람을 칼로 찌른 일도 있는 격한 성미의 카라바조에게 있어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카라치와는 전혀 달랐다. 카라바조에게는 추한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경멸할 만한 약점으로 보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진실, 곧 그가 본대로의 진실이었다. 그는 고전적인 규범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미술에 대해 아주 새롭게 생각하고 싶어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주로 관중들에게 충격을 주고자 하는 화가이며 아름다움과 전통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와같이 쏟아지는 비난을 받은 최초의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그의 예술관이 비평가들에 의해 하나의 문구로 집약되었던 첫번째 화가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를 '자연주의자(naturalist)'라고 비난했다.
3)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 1573 - 1610)
사실상 카라바조는 너무나 진지하고 위대한 예술가였기 때문에 떠들썩한 화젯거리나 불러일으키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비평가들이 이러쿵 저러쿵 하고 지껄여대는 동안에 그는 분주하게 작업을 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그로부터 삼백 년 이상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주 대담하게 보인다. 성 토마를 묘사한 아래의 작품을 살펴보자. 세사람의 사도들이 예수를 쳐다보고 있고 그 중의 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예수의 옆구리 상처를 찔러보고 있는데, 대단히 파격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림이 당시의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작품이 불경스럽고 심지어 극악무도하다고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아름답게 주름 잡힌 옷을 걸치고 위엄있는 사람으로 묘사된 사도들의 모습에 익숙해 있었는데 여기서는 사도들이 풍상을 겪은 얼굴과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인 보통의 노동자들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이렇게 대꾸했을 것이다. 사도들은 실제 늙은 노동자들이었으며 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또 부활한 예수를 의심하는 성 토마의 꼴사나운 동작에 대해서는 성경에 아주 분명하게 적혀 있다고. 예수가 토마에게 " 네 손가락으로 내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말씀하셨다(요한 복음 20장 27절).
카라바조의 '자연주의',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그것을 추하다고 생각하든 아름답다고 생각하든지 간에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하려는 그의 의도는 아마도 아름다움에 중점을 두는 카라치의 태도보다 더 돈독한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다. 카라바조는 성경을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그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였던 그는 그 전의 조토와 뒤러처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마치 그의 이웃집에서 일어난 듯이 그의 눈 앞에 그려보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는 이 오래된 성경의 등장 인물들을 보다 진실되고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심지어 그가 명암을 다루는 방법도 그의 이러한 효과를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빛은 인체를 우아하고 부드럽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깊은 어둠과의 대조를 생겨나게 하는 눈부시도록 번쩍이는 거센 빛이다. 그러나 그 빛은 이 이상한 장면 전체를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당시에는 거의 없었으나 후대의 화가들에게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4) 귀도 레니(Guido Reni : 1575 - 1642)
로마에서 자기의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킨 많은 이탈리아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귀도 레니(Guido Reni)일 것이다. 볼로냐 출신의 이 화가는 한동안 어느 파에 들어갈지 머뭇거리다가 카라치 파에 입문하기로 결심을 했다. 스승인 카라치와 마찬가지로 당시 그의 명성은 현재의 평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났었다. 한 때는 그의 명성이 파엘로와 비등할 정도로 높았는데 아래 그림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레니는 이 프레스코를 1614년에 로마에 있는 한 궁전의 천장에 그렸다. 이 그림은 오로라(새벽의 여신)와 전차를 타고 달리는 젊은 태양의 신 아폴론을 그린 것으로 아폴론의 주위에는 아름다운 처녀들(시간의 여신들)이 즐겁게 춤을 추며 따라가고 있다. 횃불을 들고 앞서가는 아이는 샛별이다.찬란한 아침을 그린 이 작품은 매우 우아하고 아름답다. 때문에 이 그림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라파엘로와 라파엘로가 그린 파르네지나 궁의 프레스코를 상기시켜 주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레니는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보고 그가 모방하고자 했던 위대한 화가 라파엘로를 생각하게 되기를 원했다.
현대 비평가들이 레니의 업적을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들은 바로 이러한 모방 때문에 도리어 레니의 작품이 순수한 미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너무 자의적이고 또 지나치게 신중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단 이러한 점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레니가 그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을 실현하기 위하여 취한 방법, 즉 비속하고추하며 그의 고상한 이상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현실보다 더 완벽하고 이상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그의 노력이 얼마나 훌륭하게 이룩되었는지 자유로이 찬미할 수 있다.
5) 니꼴라 뿌쌩(Nicolas Poussin : 1594 - 1665)
고전 시대의 조각상들에 의해 설정된 기준에 따라서 자연을 이상화하고 '미화하는' 방침을 공식화한 사람들은 카라치와 레니, 그리고 그 레니의 추종자들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떤 정해진 방법 같은 것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 고전 미술과 분명하게 구별하는 의미에서 신고전주의(neo-classical), 또는 '아카데믹한(academic)' 방침이라 부른다. 이에 대한 시비(是非)는 이내 끝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렇한 방법을 옹호한 화가들 중에 위대한 거장들이 있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 거장들은 우리들에게 순수함과 아름다움의 세계를 엿보게 해준다. '아카데믹'한 거장들 중에 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프랑스 화가 니꼴라 뿌쌩(Nicolas Poussin)이었다.
그는 로마를 제 2의 고향으로 삼고 거기서 살며 작품을 제작했다. 뿌쌩은 정열적으로 고전 시대의 조각상들을 연구했는데,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순수하고 장엄했던 고대 도시들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아래 그림은 이러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서 생겨난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 그림은 조용하고 햇빛으로 가득찬 남국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잘 생긴 청년들과 아름답고 품위있는 젊은 여인이 돌로 만든 큰 무덤 주위에 모여있다. 나뭇잎으로 관(冠)을 엮어 머리에 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젊은이들은 양치기들인 것 같다. 그들 중 한명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무덤에 새겨진 명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름다운 양치기 여자를 돌아보고 있다. 그여자는 맞은편에 있는 남자 목동과 같이 우수에 찬 표정으로 조용히 서 있다.
명문에는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 나(Ego), 즉 죽음은 목가적인이상향인 아르카디아에도 의연히 군림한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무덤을 둘러싸고 묘비명을 읽고 있는 이 인물들의 두려움과 명상의 경이적인 몸짓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인물들이 서로 반향하여 이루어내는 움직임의 아름다움은 더욱 감탄 할 만하다. 전체 구도는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그 단순함은 심오한 미술적인 지식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한 지식만이 죽음의 공포가 말끔히 가신 조용한 휴식의 이러한 회고적인 정경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6) 끌로드 로랭(Claude Lorrain : 1600 - 1682)
이와 동일한 회고적인 아름다운 분위기를 그린 작품으로 유명해진 사람은 이탈이아로 귀화한 또 한사람의 프랑스 화가였다. 그는 끌로드 로랭(Claude Lorrain)으로 뿌쌩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로랭은 캄파냐(로마 평원), 즉 아름다운 남부의 색조속에 위대한 과거를 연상시키는 장엄한 유적들이 있는 로마 주변의 평원과 언덕들을 열심히 스케치했다. 그는 뿌쌩처럼 자연의 사실적인 표현에 있어서 완벽한 기량을 그의 스케치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가 그린 나무의 습작들은 보기만 해도 즐겁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완성시킨 그림과 동판화에서는 과거의 향수 어린 꿈과 같은 정경 속에 들어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소재들 만을 선택했다. 그는 화면 전체의 장면을 현실과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금빛 광선이나 은 빛 대기 속에 이 모든 것들을 무르녹아 들어가게 묘사했다.
자연의 숭고한 대기 속에 이 모든 것들을 무르녹아 들어가게 만든 화가는 바로 끌로드 로랭이었고, 또 그가 죽은 뒤 거의 백년쯤 되었을 때 여행객들은 그의 기준에 따라서 실제의 풍경을 평가하곤 했다. 만약 어떤 풍경이 끌로드가 그려보여준 시각 세계를 그들에게 연상케 하면 그들은 그것을 아름답다고 찬미하고 거기에 앉아서 야유회를 즐기곤 했다.
6)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 1577 - 1640)
북유럽 사람으로 카라치나 카라바조 시대의 로마의 분위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접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바로 플랑드르 출신의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로 뿌쌩과 끌로드 보다는 한세대 위였고 귀도 레니와는 비슷한 연배였다.1600년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스물세 살의 나이로 로마에 왔다.그는 로마 뿐만 아니라 제노바와 만토바에서도 미술에 관한 많은 열띤 논쟁을 귀담아 들었으며 또 많은 고금의 명작들을 연구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듣고 배우긴 했으나 어떤 '운동'이나 유파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그는 기질적으로 여전히 플랑드르 인이었고, 반 에이크와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 및 브뢰헬을 배출한 나라의 화가였다. 네덜란드 출신의 이들 화가들은 항상 다채로운 사물의 표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옷감과 살아 있는 신체의 감촉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최고로 표현하기 위하여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기법고 수단을 이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화가들이 그렇게 신성시했던 아름다움의 기준에 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으며, 또 품위있는 주제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루벤스는 이러한 전통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전개되고 있던 새로운 미술에 대해 경탄했지만 그의 본질적인 신념, 즉 화가의 임무는 자기 주위의 세계를 그리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림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가 자신이 사물의 생동감 넘치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즐긴대로 느끼게 해주는 일이라는 신념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루벤스는 카라치와 그의 유파가 고전적인 전설과 신화를 그림의 주젤 그리는 것을 부활시키고 신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감동적인 제단화를 구성한 방법을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그는 카라바조가 자연을 연구할 때 보인 타협없는 성실성 또한 높이 평가했다.
1608년에 안트웨르펜으로 돌아왔을 때 루벤스는 31세의 청년으로 이탈리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다. 그는 붓과 물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나체이든 옷을 입은 인물이든, 또한 갑옷이나 보석, 동물이나 풍경등을 탁월하게 묘사했으며 대규모의 작품을 거침없이 구성할 수 있는 기량을 쌓았다. 사실상 알프스 이북에서 그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이전의 플랑드르 화가들은 배부분 작은 그림만을 그렸다. 그런데 그는 이탈리아로부터 교회와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서 거대한 화면을 선호하는 취향을 플랑드르에 도입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고관대작들과 군주들의 취향에 잘 들어맞았다. 그는 거대한 화면 속에 인물들을 배치하고 전체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빛과 색채를 구사하는 기술을 공부했다.
위의 그림은 안트웨르펜의 한 교회당의 주제단을 장식할 그림으로서 그가 이탈리아 선배 화가들의 작품을 얼마나 잘 연구했으며 또 그들의 이념을 얼마나 대담하게 발전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윌튼 두폭화>, 벨리니의 <성모> 또는 티치아노의 <페사로의 성모> 이래로 화가들이 붙잡고 씨름했던 유서 깊은 테마인 성인들에게 둘러싸인 성모를 그린 그림이다. 루벤스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이 전통적인 주제를 얼마나 자유자재로,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 다루었는지를 보려면 이 도판들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얼핏 보아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즉 이 그림에서는 앞에서 예로 든 어떤 그림에서보다도 더 많은 움직임과 빛, 그리고 훨씬 공간감이 넘치고 있으며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성인들은 축제의 인파와도 같이 성모의 높은 왕좌로 모여들고 있다.
전경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와 순교할 때의 불에 달군 석쇠를 들고 있는 성 로렌스, 그리고 토렌티노의 성 니콜라우스 수사가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그들의 예배의 대상인 성모에게로 이끌고 있다. 용을 누르고 있는 성 게오르기우스와 화살과 화살통을 곁에 두고 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열렬한 감정으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전사 한 사람이 순교의 상징인 종려 나무 잎을 손에 들고 왕좌앞에 막 무릎을 꿇으려 하고 있다. 수녀 한 사람이 포함된 한 무리의 여인들이 황홀하게 주 장면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것은 아기 예수가 성모의 무릎위에서 몸을 굽혀 한 어린 소녀에게 반지들 주려고 하는 장면이다. 작은 천사 하나가 반지를 받으려는 소녀를 도와주고 있다. 이 그림은 성 카타리나의 약혼의 전설을 묘사한 것이다.성 카타리나는 환상 속에서 이러한 장면을 보고 그녀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왕좌의 뒤에는 자애로운 시선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는 성 요셉이 있고 열쇠를 들고 있는 성 베드로와 칼을 들고 있는 성 바오로는 깊은 생각에 잠긴채 서 있다. 그들은 맞은편에 홓로 서서 빛을 가들 받으며 무아의 지경으로 경배하며 두 손을 높이 들고 서 있는 당당한 성 요한의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귀여운 두 천사가 멈칫거리는 작은 양을 왕좌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하늘에는 또 한쌍의 천사들이 성모의 머리에 씌워줄 월계관을 들고 내려오고 있다. 이렇게 세부를 잘 살펴보고 난 뒤에 다시 한번 화면을 전체적으로 보면 루벤스가 붓을 크게 휘둘러서 이처럼 많은 등장 인물들을 한데 묶고 또 즐겁고 축제와 같은 장엄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 것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이처럼 거대한 화면을 그처럼 확고한 관찰력과 손재간으로 계획할 수 있는 이 거장에게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그림 주문이 쇄도했다는 것은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
루벤스에게 그 이전의 어떤 화가도 누려보지 못한 명성과 성공을 거두게 만든 것은 거대하고 다채로운 화면을 손쉽게 구상하는 천부적 솜씨와 그 속에 활기가 충만하게 떠 돌 수 있게끔 하는 비할 데 없이 탁월한 재간과의 조화에 있었다. 그의 예술은 궁정의 사치와 화려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그러한 왕족들의 권력을 미화하는 데 대단히 적합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이러한 영역을 그가 혼자서 독점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 당시는 유럽의 종교적 사회적 긴장이 대륙 전역에서는 무서운 30년 전쟁으로, 그리고 영국에서는 내란으로 절정에 달해 있었다. 한쪽에는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받은 절대 군주들과 그들의 궁정이 있었으며 다른 편에는 대부분이 신교도인 신흥 상업 도시들이 발흥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자체도 스페인의 '가톨릭' 지배에 저항한 신교 국가인 홀란트와 스페인과의 동맹하에서 안트웨르펜의 지배를 받는 가톨릭 교의 플랑드르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 가톨릭 진영의 화가로서 루벤스는 독자적인 지위에 올라섰다. 그는 안트웨르펜의 예수회 교단, 플랑드르의 가톨릭 교 통치자들, 그리고 프랑스의 국왕 루이 13세와 그의 교활한 모친 마리아 데 메디치,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3세, 그리고 그에게 작위까지 하사한 영국의 국왕 찰스 1세로부터 많은 그림 주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귀빈 대접을 받으며 한 왕실의 궁전으로부터 다른 궁전으로 이동해 다니면서 때로는 미묘한 정치 외교적인 임무를 맡기도 했다.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이 소위 '보수(保守)' 동맹을 위해서 영국과 스페인을 화해시킨 일이다. 그런 중에도 그는 당대의 대학자들과 접촉을 유지했고 고고학과 예술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해박한 라틴어로 서신을 교환했다. 귀족임을 암시하는 검(劍)을 차고 있는 그의 자화상은 그가 자신의 톡특한 지위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매서운 눈매에는 자만심이나 허영심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진정한 예술가였다.
아래의 그림이 그가 그린 그림의 하나인데 이것은 루벤스가 스페인과의 화평을 설득하고자 영국 국왕 찰스 1세에게 선물로 가져갔던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평화의 축복을 전쟁의 공포와 대조시키고 있다. 지혜와 예술의 여신인 미네르바는 막 퇴각하려고 하는 군신(軍神) 마르스를 쫓아내고 있는데, 군신의 무시무시한 동료인 전쟁의 신 퓨리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다. 미네르바의 보호아래 결실과 풍요의 상징으로서 평화와 기쁨이 우리들 눈 앞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구상은 루벤스 만이 해 낼 수 있는 그 특유의 것이다. 평화의 여신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려고 하고 있고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목신은 먹음직한 과일들을 더 없이 행복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술의 신 바쿠스를 섬기는 여 사제들은 금과 보석을 가지고 춤을 추고 있으며 큰고양이처럼 평화스럽게 장난을 치고 있는 표범이 있다. 그 반대 쪽에는 전쟁의 공포에서 평화와 풍요의 안식처로 도망온 겁에 질린 표정을 한 세 어린이들에게 한 젊은 수호신이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이 그림의 풍부한 세부 묘사와 생생한 대조들, 빛나는 색채에 몰입되어 보게 되면 이러한 구상들이 루벤스에게 있어서는 맥빠진 추상으로서가 아니라 박진감 넘치는 현실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7)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 1599 - 1641)
루벤스의 유명한 제자와 조수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사람은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이다. 그는 루벤스보다 스물두 살이 아래였으며 뿌쌩과 끌로드 로랭의 세대에 속한다. 그는 비단 옷이건 인간의 육체이건 간에 사물의 질감과 표면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루벤스의 모든 기법을 곧 터득했으나 기질과 분위기는 그의 스승과 대단히 달랐다. 반 다이크는 건강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힘이 없고 다소 우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바로 이러한 자질 때문에 제노바의 근엄한 귀족들과 찰스 1세와 그의 왕당파 당원들이 그의 그림에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른다. 그는 1632년에 찰스 1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고 그의 이름도 영국식으로 안토니 반다이크 경(Sir Anthony Vandyke)으로 표기했다. 오늘날 거만한 귀족적인 태도나 궁정적인 세련미를 숭상하던 당시의 영국 사회에 관한 그림의 기록을 갖게 된 것은 반 다이크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사냥을 하던 중에 방금 말에서 내린 찰스 1세의 초상화는 역사 속에 영원히 남고자 원했던 스튜어트 왕조의 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의 찰스 1세는 비할 데 없이 우아하고 확고한 권위와 높은 교양을 갖춘 인물이며, 예술의 후원자이자 신으로부터 왕권을 부여받은 자로서 타고난 위엄을 강조하기 위해 권력의 다른 외형적인 장식이 필요치 않았던 한 남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자질들을 초상화 속에서 그처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화가를 당시의 귀족 사회가 갈망했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반 다이크는 너무나 많은 초상화 주문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스승 루벤스처럼 혼자서 그 주문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조수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인형에 초상화를 주무한 사람의 옷을 입혀서 그것을 그렸다. 나머지 얼굴 부분조차도 반 다이크가 손대지 않은 작품도 많았다. 불쾌하게도 이러한 초상화들 중 일부는 후대의 의상 마네킹들과 비슷하게 미화되어 있었다. 반 다이크가 초상화에 많은 해독을 끼친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는 데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실이 그의 걸작 초상화들의 위대성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8)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azquez : 1599 - 1660)
루벤스는 스페인을 여러차례 여행하던 중에 젊은 화가를 만났는데 그 젊은 화가는 루벤스의 제자 반 다이크와 같은해에 출생했고 바 다이크가 찰스 1세의 궁전에서 차지하고 있던 비슷한 지위를 마드리드의 펠리페 4세의 궁전에서 누리고 있던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azquez : 1599 - 1660) 였다. 벨라스케스는 그때까지 이탈리아에 가 본적은 없었지만 모방자들의 작품을 통해서알게된 카라바조의 발견들과 그의 수법에 커다란 감명을 받고 있었다. 그는 '자연주의' 의 방침을 흡수하여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데 그의 예술을 바쳤다. 아래의 그림은 그의 초기 작품의 하나로 세비야 거리에서 물을 팔고 있는 한 노인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네덜란드 화가들이 그들의 재주를 과시하기 위해서 고안해낸 그런 유형의 '풍속화'이지만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성 토마>와 같이 강렬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그려졌다.
지치고 주름살 투성이 얼굴에 누더기 망토를 걸친 노인과 둥근 모양의 큼직한 토기 항아리, 유약을 바른 단지의 표면과 투명한 유리 잔에 어른거리는 빛 등 모든 것이 너무나 실감나게 그려져 있어서 그 물건들을 마치 손으로 만져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이 그림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여기에 표현된 물건들이 아름다운지 아닌지 또는 이 장면이 중요한지 아닌지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색채도 엄격하게 말해서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갈색과 희색, 녹색 계통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전체는 너무도 풍요롭고 원숙한 조화속에 어울려 있어 이 그림 앞에 한번 서본 사람은 결코 이 그림을 잊을 수 없게 된다. 루벤스의 충고로 벨라스케스는 위대한 거장들의 그림을 연구하기 위해서 로마로 갔다. 그는 1630년에 로마에 갔다가 곧 마드리드로 돌아와서 두번 째 이탈리아 여행을 젱외하고는 펠리페 4세의 궁정에서 유명하고 존경받는 화가로 지냈다.
그의 주요 임무는 왕과 왕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매력적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재미있는 얼굴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확실히 그들은 그들의 위신을 내세우며 딱딱하고 어울리지 않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화가로서는 이 일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마치 마술을 부린 것처럼 이들의 초상화들을 사상 유례 없는 가장 매혹적인 그림들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루벤스와 티치아노의 필법을 연구했으나 자연에 접근하는 그의방식에는 '남에게서 빌어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래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로 티차아노가 그린 <교황 바오로 3세>보다 백 년 뒤인 1649 - 1650년에 로마에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미술의 역사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반드시 견해의 변화를 유도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티치아노가 라파엘로의 그림에서 자극을 받았던 것처럼 벨라스케스는 티치아노가 그린<교황 바오로 3세> 에 대해서 도전 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붓을 가지고 물질의 광택을 표현하는 방법이나 교황의 표정을 포착한 붓질의 정확성에 있어서 티치아노의 수법을 완전히 터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이 실물을 묘사한 그림이며 잘 베껴낸 공식같은 그림은 아님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로마에 가면 누구나 팔라초 도리아 팜필리에 있는 이 걸작을 보는 위대한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사실 벨라스케스의 원숙한 작품들은 붓놀림의 효과와 색채의 섬세한 조화에 대단히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도판만 가지고는 원화가 어떠한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 그러한 예를 들 수 있는 것이 <라스 메니나스(시녀들) Las Meninas>라고 알려진 높이가 3 미터에 이르는 대작이다. 우리는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벨라스케스 자신을 화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그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뒷벽에 있는 거울에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앉아있는 왕과 왕비의 모습이 비춰져 있다. 그러므로 중앙의 한 무리의 사람들은 화실을 방문온 것으로 여겨진다. 중앙의 인물은 두 시녀를 좌우에 거느리고 있는 왕의 어린 딸 마르가리타 공주이다. 시녀 중의 한 사람은 공주에게 다과를 주고 있고 다른 시녀는 국왕 부처에게 절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시녀들의 이름 뿐만 아니라 심심풀이로 궁안에 데리고 있는 두 사람의 난쟁이(못 생긴 여자와 개를 놀리고 있는 소년)의 이름도 알고 있다. 배경에 있는 심각한 얼굴을 한 어른들은 방문객들이 얌전하게 구는지 살피는 것같이 보인다.
이 그림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을 알 수는 없으나 나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미 오래전 에 벨라스케스는 현실의 한 순간을 화면에 담았다고 상상하고 싶다. 아마도 왕과 왕비가 앉아 있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 공주를 불러들였는데 왕이나 왕비가 벨라스케스에게 그가 그릴만한 모델이 왔다고 말을 했을 것이다. 지배자가 한 말은 언제나 명령으로 간주되므로, 이 지나가는 말은 벨라스케스에 의해 현실화되어 이같은 걸작이 탄생되었을 것이다. 물론 벨라스케스는 그의 현실에 대한기록을 위대한 그림으로 전환시키는 데 있어서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당시 두 살이었던스페인의 왕자 펠리페 프로스페로의 초상과 같은 작품에는 인습에서 탈피한 곳은 하나도 없다. 아마도 얼핏 보아서는 인상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화에서는 여러 가지 농도의 붉은 색조(호사스러운 페르시아 카펫에서부터 벨벳 덮개을 씌운 의자, 커튼과 어린이의 소매와 불그스름한 볼에 이르기 까지)가 배경속으로 몰입되는 흰색과 희색의 차가운 은빛 색조와 결합되어 독특한 조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붉은 의자위에 앉아 있는 강아지와 같은 작은 모티프조차도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탁월한 솜씨를 드러내 보인다.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의 약혼>에 나오는 작은 개와 비교해보면 위대한 미술가들은 제각기 다른 수단으로 독특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 에이크는 작은 개의 곱슬곱슬한 털 하나 하나를 모사하는 데
온 정성을 쏟고 있는 반면에, 그로부터 이백 년 뒤의 벨라스케스는 개의 특징적인 인상만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레오나를도처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한층 꼭 필요한 것만을 묘사하고 보는 사람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비록 그는 털을 하나도 그리지 않았지만 그의 작은 개는 사실상 반 에이크의 개보다 훨씬 더 털이 북실북실하고 자연스럽게 보인다. 19세기의 파리에서 인상주의의 창시자들이 과거의 어느 다른 화가들보다도 벨라스케스를 존경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효과 때문이었다.
자연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관찰하며 색채와 빛의 새로운 조화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화가의 기본적인 과제가 되었다. 유럽의 가톨릭 진영에 살던 위대한 미술가들이나 정치적 장벽의 또 다른 쪽인 신교도의 네덜란드에 살던 위대한 미술가들이나 이 점은 모두 같았으며 이러한 새로운 임무에 그들의 열정을 쏟았다.